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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여름과 살평상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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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던 장마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일까. 모처럼 볕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하늘이 온통 파랗게 개인 것은 아니다.

구름이 어정쩡하게 끼인 사이로 내리는 볕은 여름의 끈적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하늘의 모양새로 봐서 비는 질리게 더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내겐 이런 여름도 싫지 않다.

젊은 날,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지루한 장마철이야 말 할 것도 없고, 쨍쨍한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여름은 무조건 싫다고 답했을 것이다.

여름이 싫은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너무 뜨거워서 싫었고,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무성해서 싫었으며, 너무 끈적거려서도 싫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여름을 참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가 삼십대 후반인지 사십대 초반인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내 생애의 여름이 이미 내 곁을 지나가고 있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아직 내 어린 날의 유일한 사랑의 현장이었던 살평상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인 내게 어머니의 사랑은 항상 손닿지 않는 저만큼 먼 곳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생활에 바쁜 어머니로서 맏딸도 아니고 막내인 외아들도 아닌 중간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초봄은 그렇게 샛바람 속에 떨며 지나갔다.

시린 가슴을 안고 떨며 자란 기억 밖에 갖지 못했던 내게 어린 날의 추억 같은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만 보고 냅다 달렸다.

정신 없이 달리다 보니 사십 중반을 후딱 넘겼고 시간에 쫓기며 서두르다 보니 육십이 넘어갔다.

육십을 넘긴 어느 여름밤 마당 한켠에 쌓아두었던 깎은 잔디 찌꺼기에서 묻어나는 건초냄새가 내게도 추억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꺼져 가는 모깃불에서 나는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살평상. 거기에는 훈훈한 어머니의 냄새가 있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첫해 여름. 아무것도 없는 살림과 어린 삼남매만을 당신 앞에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며, 밤이면 밤마다 살평상에 나앉아 망연자실하던 어머니가 기억난다.

방안의 모기장 속에서 자다가 깨어보면 살평상에 홀로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던 어머니. 그 모습이 하도 처량하여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누워 몰래 울던 조숙한 열 살 어린 가슴의 내 상처도 함께 떠오른다.

그 후 어머니는 많이 강해졌고, 여름밤의 우리 집 살평상은 세 들어 사는 피난민 이웃들과 어머니의 과거담을 술회하는 무대가 되었다.

어머니는 남동생을 일찌감치 재우고 나면, 마당으로 나가 모깃불을 피우고 살평상에 앉아 이웃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언니와 나도 살평상으로 나가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그러나 얼마큼 시간이 흐르면 나면 어머니는 하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우리에게 방에 들어가 자라고 일렀다.

말 잘 듣는 아이였던 언니는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지만, 나는 엄마 곁에 쪼그리고 누운 채 자는 척 해 본다.

그럴라치면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방으로 들어가라고 깨우거나 나무라지 않고 꼬부린 다리를 펴 주며 간간이 부채질로 모기를 쫓아 준다.

그 달콤함을 이 세상 누가 알랴. 어머니와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나는 가수면 상태에 빠져든다.

들리다가 말다가 하는 어머니의 음성이 어쩌면 그렇게도 듣기 좋은지. 그것은 천국에서 들려오는 노래였다.

건초냄새로 살평상에 얽힌 여름밤의 기억들을 되찾은 후, 나는 비로소 부채질로 모기를 쫓아주던 어머니의 그 덤덤한 사랑이 내게 강인한 힘을 길러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날 이후 나는 좋은 살평상 하나를 장만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살평상 위에 누워 손자와 함께 여름밤의 별을 헤어보기도 하고, 그 녀석에게 이웃사랑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 그 옛날 내 어머니처럼 벽을 허물고 이웃과 둘러앉아 사는 이야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직도 멋진 살평상을 갖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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