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감정 이렇게 풀자(8)-스페인

아름다운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 1992년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던 몬주익 언덕을 내려서서 항구를 따라 30분쯤 걸어가면 제법 고풍스런 건물 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 역사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하자 박물관 관계자는 우리 돈으로 4천원 정도인 입장료를 받지 않고, 원래 관람 후 회수하도록 돼 있는 안내 책자도 무료로 주었다.

물론 금지돼 있는 사진촬영도 허락해 주었다.

유럽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서도 만나기 힘든 후한 인심을 베푼 셈이다.

하지만 이런 후덕함 속에는 오랜 역사 속에 묻혀있는 아픔과 한이 담겨있다.

스페인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 위대한 예술가 달리·미로·피카소·가우디를 낳은 도시, 하지만 스페인이기를 거부하는 도시, 그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이다.

박물관 3층 근대 역사관에 올라가자 애처롭고 한맺힌 곡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국가(國歌) '엘스 세가도르스(Els Segadors)'(수확자들)다.

지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개·폐막식때 스페인 국가와 함께 연주됐었다.

제목과 달리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즐거워하는 노래가 아니라 수탈에 시달리며 신음하는 농부들의 아픔을 담고 있다.

아울러 카탈루냐의 독립을 염원하며 중앙 정부군에 맞서 싸우던 시민군의 피와 고통을 담고 있다.

'낫을 흔들자/이제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적은 떨고 있다/황금 곡식을 수확하듯이 우리는 다시 한번 자유를 위해 사슬을 끊을 것이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지만 비장하다 못해 살벌한 느낌마저 준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 중 대부분은 바르셀로나 학생들이다.

떠들고 장난치던 이들도 국가가 흘러나오는 전시관에 들어오면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숙연해진다.

현재 스페인의 공용어는 4개이다.

표준어인 카스티아어는 과거 이베리아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로마제국의 산물이다.

나머지 방언들 즉, 카탈루냐어나 갈리시아어 등도 라틴어에서 파행된 말들이지만 카스티아어는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아왕국과 아라곤왕국의 언어였던 덕분에 결국 스페인을 대표하는 표준어가 됐다.

스페인은 강력한 중앙집권 아래 지방언어 말살 정책을 실시했으나 지난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카탈루냐어가 지역 표준어로 인정됐다.

사람 이름이나 거리명칭도 모두 카스티아어에서 카탈루냐어로 바뀌었다.

교육과정을 보면 완전히 다른 나라나 다름없다.

학생들은 스페인 표준어인 카스티아어를 중학교에서 외국어로 배운다.

유치원에선 카탈루냐어로 된 노래와 동화를 들려주고, 초등학교에서도 역사와 지리·문학 등은 자체적으로 만든 교과서로 카탈루냐를 배운다.

그럼에도 현재 전체 인구의 60% 정도는 일상 생활에서 카스티아어를 사용한다.

바르셀로나의 특성상 외지 유입 인구가 워낙 많고, 스페인어(카스티아어)를 사용하는 관광객이나 사업가들과 자주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출신이면서 바르셀로나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카르메로 코르네조씨는 "사실 언어 때문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은 미미하다"며 "오히려 식습관이나 풍습에서 차이를 발견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르네조씨는 고향이 마드리드인데다 어쩌면 '적진'이나 다름없는 바르셀로나에서 생활하다보니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이 대수롭지 않다고 느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 토박이들이 느끼는 두 지역간의 차이, 이른바 지역갈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도심에서 만난 한 시민은 "스페인을 하나로 보는 책은 정부 공문서와 관광안내서 뿐"이라며 "카탈루냐는 결코 스페인의 한 지역일 수 없으며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 언어를 자랑하는 엄연히 다른 나라"라고 주장했다.

스페인의 지역주의는 영국과 닮은 면이 있다.

15세기 스페인이 통일된 뒤 해외로 눈을 돌려 수많은 식민지를 획득했다.

그러나 1898년을 마지막으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경제적 몰락이 시작됐고 과거의 부귀영화는 추억속에만 남게 됐다.

이처럼 식민지가 독립하고 경제가 침체되자 지역주의 운동이 전개됐다.

그런 가운데 식민지 경영에 최일선에서 나서 해외로부터 수많은 물자와 인력, 기술을 넘겨받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경제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독립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시각은 달랐다.

독재 정권이 들어서며 지방은 철저히 억압했다.

모든 것은 중앙에서 통제하고 지방은 그에 따르도록 만들었다

마드리드 사람들은 "스페인은 하나다.

중앙의 통치는 가장 효율적이고 발전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고 있는데 왜 굳이 중앙의 기준에 맞춰야 하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중앙정부와 카탈루냐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중앙정부가 군사 지원을 약속하자 바르셀로나에선 극심한 반전 데모가 일었다.

집집마다 '전쟁은 싫다(No ala guerra)'를 흰 천에 써서 내걸었다.

1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 총리 사임을 요구했다.

지난 1977년 자치권 확보투쟁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극한 대립은 사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카탈루냐에도 극우정당이 있지만 다수석은 온건 카탈루냐동맹(CIU)이 차지했다.

지난 2000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집권 국민당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도 의회 투표에서 카탈루냐동맹의 지지에 힘입어 전체 의원 350명 중 202명의 찬성표를 얻어낼 수 있었다.

회사원 후안 카발레라씨는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카탈루냐인의 요구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독특한 지방 차이에 대한 인정"이라며 "이를 무시하고 중앙 정부가 자치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언제고 카탈루냐인들은 다시 봉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팀=서종철·김태형·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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