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진보다.
무엇이 진보인가? 대구 U대회 때 북한 김정일의 초상이 비에 젖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쪽에서 온 응원단인가 하는 여성들이 항의했을 때 주최측이 사과하는 것을 보고 잘했다고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진보를 표상한 것일까? 미국 성조기를 불태우고 북한 인권문제에는 입 다무는 것이 진보일까?
진보라는 개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위에 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일까? 진보에 놈 '자'를 붙여서 그냥 진보자라고 하면 어딘가 어색하게 들린다.
주의자라고 해야 어감이 난다.
그러니까 진보를 입에 담는 사람은 일종의 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주의자란 어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진보주의자는 그러니까 일종의 사상가다.
일가견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몹시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공산주의체제를 그대로 정치면에서 유지하고 있는 나라인 중국에서는 자본주의를 경제면에서는 진보주의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나 종종 이와는 다른 반대현상을 보게 된다.
우리사회도 그런 예에 속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간혹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진보적이라고 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사회주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공산주의국가들, 특히 그 대표적인 국가들인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공산주의는 낡았다고 하고 자본주의 쪽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아직 유아(幼兒)단계에 있는 층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웬일일까 아주 참신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후진성의 일면이다.
생산은 생각(고려)도 하지 않고 분배만 주장하는 층이 있다.
그들이 진보주의자들이라고 자인(自認)하고 있는 듯도 하다.
어딘가 희극적으로 비치지 않는가? 시인 보들레르는 19C에 이미 말하고 있다.
범선(帆船)이 증기선(蒸氣船)으로 변했다고 그것을 두고 진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심성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진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고 - 요는 보들레르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인간의 심성이란 일천년 전의 예수시대나 19C의 보들레르시대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진보란 말을 잠정적인 것으로 쓸 수는 있다.
보들레르가 말한 범선이 증기선으로 변한 것은 배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내 딸애가 다리에 골수염을 앓아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지금은 겨우 아물어가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병은 불치의 병이었다.
다리를 잘라야 했다.
왜 우리또래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말이 있지 않는가? '골병(骨病)'이란 말 말이다.
세상에도 몹쓸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막간다는 뜻의 말이다.
그러니까 의술(醫術)은 확실히 진보했다.
이 방면에서는 진보란 말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재래식 변소로 일을 치르고 집에 욕탕이 없어 대중공동탕에 가야만 했던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지금은 생활환경이 개선됐다.
그런 현상을 두고 진보라고 한다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상도 인간의 근본문제 사회의 근본문제 - 인간을 진짜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보가 왜 좋다고 하는가? 그 좋다는 정도는 잠정적이다.
그러니까 인간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진보란 한갓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잠정적인 진보는 언제나 늘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 잠정적인 상태는 언제나 늘 그 생태 그대로다.
말하자면 그칠 날이 없다.
역사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잠정적이요 현재진행형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잠정적인 차원의 진보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생활주변이 개선되고 의술이 좋아졌다고 인간이 행복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심성이라는 이 요지부동의 존재를 때로는 의식하면서 진보를 말해야 한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자기들을 정의의 입장에 서있다고들 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 정의는 심정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너무 흥분하지 말지어다.
유치하지 않은가? (시인)
댓글 많은 뉴스
"제대로 했으면 출마도 못해" "권력에 무릎"…'李재판 중단'에 국힘 법원 앞 집결
노동계, 내년 최저임금 '1만1500원' 요구…14.7% 인상
박홍근 "정당법 개정안 통과시켜 국민의힘 해산시켜야"
대북 확성기 중단했더니…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 껐다
대통령실 "청와대 복귀에 예비비 259억원 책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