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금들녘...유해 조수와의 전쟁

풍성해야 할 가을걷이가 야생동물 때문에 망치고 있다. 도내 곳곳에선 멧돼지가 출몰해 논이며 밭을 마구 파헤치고 있고, 울릉에선 꿩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밀양에선 왜가리떼 때문에 농민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수확철 농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생동물과의 전쟁을 살펴보았다.

▨ 낮에도 설치는 대담해진 멧돼지

"올해처럼 힘들게 농사지은 해도 없었는데, 멧돼지 때문에 그나마 남은 농사도 다 망쳤습니다".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뒷산 금무봉 일대는 멧돼지떼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10여마리씩 몰려다니는 멧돼지떼는 산과 가까운 논밭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수확기 농작물을 망쳐놓고 있다. 주민들은 "송아지만한 멧돼지가 논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벼를 쓰러뜨리고, 벼이삭을 마구 훑어먹고 있다"며 읍사무소와 군청에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일부 주민들은 멧돼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마을 주민 정현수(47.왜관읍 낙산3리)씨는 "수십년간 농사를 지었지만 멧돼지가 벼이삭까지 망치는 것은 처음 봤다"고 고개를 저었다. 정씨의 논 1천600여평 중 500여평이 멧돼지 피해를 입었다.

견디다 못한 정씨는 최근 이장 전창규(45)씨와 함께 멧돼지쫓기에 나섰다. 먼저 밤 7~8시 사이 10여분간 폭죽을 터뜨린다. 멧돼지가 화약냄새에 민감하다는 소문을 들은데다 폭죽소리에 놀라서 논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얼마 전엔 진돗개 2마리를 끌고 논에서 기다렸다가 때마침 마주친 멧돼지떼들과 한바탕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전 이장의 진돗개는 멧돼지와의 싸움에서 머리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최근엔 하루 종일 개를 논둑 위에 묶어두고 멧돼지 접근을 봉쇄하고 있다. 전 이장은 "진돗개를 멧돼지쫓기에 동원하는 것은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일 것"이라며 멧돼지 일제소탕이 시급하다고 했다.

의성군 봉양.옥산.점곡 등지의 산간 마을에는 멧돼지떼가 대낮에도 겁없이 출몰하고 있다. 민가와 도로변 근처 논까지 내려와 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부분 노인들만 사는 이 마을에선 눈 앞에 뻔히 멧돼지를 보고도 쉽사리 쫓아내지 못한다. 농민 신영훈(46.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씨는 열흘전 수확을 앞둔 논에 나갔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태풍으로 농사를 망치기는 했지만 한해 가족 식량으로는 충분할 줄 알았는데 싸그리 멧돼지에게 짓밟히고 만 것. "논 400평을 추수했지만 예년의 30%인 7포대(40kg 기준) 밖에 못 거뒀습니다. 결국 뼈 빠지게 농사지어서 멧돼지한테 바친 꼴이 돼 버렸습니다".

과수원이나 고구마밭도 예외는 아니다. 농민 박영흠(56.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씨는 "200평 고구마밭에 최근 멧돼지가 덮쳐 씨알 굵은 고구마만 먹어치운 바람에 수확할 게 없다"며 한숨지었다. 2천여평 과수원에 배농사를 짓는 김정우(45.청도군 풍각면 송서리)씨는 "태풍으로 배가 절반 이상 떨어졌는데 요즘엔 멧돼지가 남은 배마저 따먹고 다녀서 농사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라고 했다.

▨ 울릉도의 골치덩이 야생꿩

울릉도 곳곳에는 야생꿩이 떼지어 농경지를 덮치는 바람에 무.배추.감자.콩.옥수수 등을 경작하는 섬 지역 농업이 황폐화되고 있다. 농민 김효상씨(57.울릉군 서면 태하리)는 "배추속이 여물기 시작한 이달 중순부터 야생꿩이 떼를 지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바람에 1천여평이 황폐화됐다"고 했다. 이상학씨(62) 농장도 마찬가지. 배추 농사를 망쳐 김장 배추를 포항에서 사야 할 형편이다.

지역 유일의 평지인 천부리 나리마을 농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30년째 무.감자 등을 재배해 온 남영신(63)씨는 "하루에 수십마리씩 꿩들이 몰려다니면서 감자밭을 파헤치는 바람에 줄기가 말라죽어 농사를 망쳤다"며 "예전에 없던 야생꿩이 왜 이렇게 설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부 농민은 아예 재배 작물을 바꿨다. 섬지역의 농업구조가 달라질 정도다. 정수학(50)씨는 지난해 망친 콩농사를 포기하고 더덕농사로 작물을 바꾸었다. 취나물 등 산나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임병대(62)씨는 "봄철에 파종한 산나물 뿌리를 파헤치는 바람에 손해을 입었지만 배추.감자보다는 피해가 적다"며 "다른 농민들도 그나마 피해가 적은 특수작물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했다.

울릉군 농업기술센터 장병태(50)씨는 "육지에 사는 꿩들은 평지에서 양발로 도약을 시도하면서 날아오르지만 섬지역 절벽에 적응한 꿩은 수직으로 날아오르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야생동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울릉도의 특성상 천적이 없는 꿩은 급속도로 번식하는 실정이다.

▨ 왜가리까지 설치지만 대책은 전무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왜가리도 농민들에겐 골치덩이다. 밀양의 곡창지역인 상남.상동.부북면 일대에는 해마다 수백마리의 왜가리떼가 먹이를 찾아 논으로 날아들어 벼를 마구 짓밟고 있다. 논에 있는 미꾸라지, 개구리 등을 잡아먹기 위해 수백마리씩 무리지어 논을 덮치고, 날개짓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벼가 부러져 콤바인으로 벼를 베기에도 어려울 정도. 한 주민은 "10년전쯤 왜가리 수십마리가 부북면 들녘에 모습을 드러낸 뒤 해마다 수가 늘어 현재는 500여마리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야생조수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지만 대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일부 행정기관은 이달 28일까지 유해조수 포획을 허가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멧돼지를 잡아봐야 별 소득이 없기 때문. 멧돼지 사냥에 나섰던 박모(55)씨는 "몇년 전만 해도 멧돼지를 사겠다는 식당들이 줄을 섰지만 요즘엔 멧돼지를 잡아도 처분할 곳이 없다"며 "천적도 없는 멧돼지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울릉군도 오는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를 유해조수 구제기간으로 정하고 수렵인 10여명을 동원한다. 사실 지난 98년부터 두달씩을 정해 6천여마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개체수는 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관광도 겸해서 연중 꿩을 잡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형편이다.

한편 울릉도에는 70년대 후반까지 야생꿩이 없었지만 지난 81년 박모씨가 관상용으로 기르던 꿩 20여마리가 달아난 뒤 20여년만에 수만마리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봉국.허영국.이홍섭.이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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