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사 교육팀은 2004학년도 대학입시 전형을 앞두고 송원학원 논술팀과 공동으로 6회에 걸쳐 논술 특강을 실시합니다.
실전 논술을 조금이라도 더 접하고 싶다는 수험생, 학부모들의 요청과 고교 교사들의 제안에 따른 것입니다.
수험생들의 깊이 있는 이해와 풍부한 자료 읽기를 위해 신문과 인터넷을 동시에 활용합니다.
교육섹션에 게재된 문제와 제시문에 대한 모범 예문과 상세한 해설은 홈페이지(www.imaeil.com) '대학입시' 코너와 송원학원 홈페이지(www.songwonedu.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송원학원 홈페이지에 논술문을 올리는 학생들에게는 전문 강사진이 첨삭지도도 해 드립니다.
수험생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챩 다음 세 제시문은 모두 과학에 대한 통념이나 고정 관념을 비판하고 있다.
제시문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과학적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술하시오. (띄어쓰기 포함 1,600자 ±100자)
[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과학이라는 말이 본래의 뜻과는 달리 '정확하다', '완벽하다' 또는 '좋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혼란은 오히려 과학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게 만들었고 과학 방법에 충실한 과학을 그렇지 못한 유사 과학과 구별하는 것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흔히들 '과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주장하는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에 따라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주장하는 바가 진실이면 과학이고, 주장하는 바가 거짓이면 비과학이라는 것이다.
과학의 내용은 항상 완전하고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구분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의미 있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진리인지를 가려내는 능력과 방법이 없다면 '과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론이 '참이냐 거짓이냐'에 의해 결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과학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결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 의해서 구분해야 한다.
과학이란 인간이 이성을 이용해서 합리적으로 진실을 추구해 가는 사고 체계이다.
따라서 어떤 결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결론이 유도되는 과정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을 결론의 학문이 아니라 과정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운동 선수가 경기에 이기기 위해 시합 전에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생각은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 선수의 그런 결론이 오랫동안의 통계를 근거로 하고 있다면 그가 얻은 결론을 비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머리를 깎지 않으면 승률이 올라가는지를 밝히는 것은 과학이 풀어내야 할 또다른 과제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론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 올바른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곽영직, '과학이야기'에서
[나] 과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취약점은 그들의 '비합리주의' 또는 '반논리주의'적 취향이다.
이들은 대체로 세상에는 합리적인 논리만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상식을 자신들의 취향을 지지해 주는 강력한 근거로 여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상식은 실상 그다지 큰 힘이 되어 주지 못한다.
이 세계의 전부가 논리에 의해 규명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과학의 기세가 꺾일 이유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작업은 모든 것이 다 논리에 의해 규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무리한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전제가 정말로 성립한다면 이른바 과학적 진리라고 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라 논리학자의 분석이나 형이상학자의 사변(思辨)에 의해 다 캐내질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서 논리의 역할은 관찰할 수 있는 여러 경험적 현상들의 연관 관계를 포착하여 법칙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맥락에서 비로소 중요해진다.
과학적인 설명이 논리에 어긋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꼭 과학의 설명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설명이란 것은 인간들 간의 일종의 의사 소통인데, 모든 의사 소통이 그렇듯이 그것이 성공하려면 의사 소통을 규제하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논리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의사 소통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규칙 중에서도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설명을 통한 지식의 체계적인 확대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우주의 한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이 우주는 그 존재 자체가 경이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그 자신이 우주의 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포괄한 우주를 다시 자신의 머릿속에 포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그 중에서도 경이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태수, '과학 비판에 대한 재검토'에서
[다] 과학자가 자연을 꿰뚫어 보려고 할 때 지니는 통찰력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상상력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인 사고에 의한 것인가? 문학가에게 이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문학가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이란 객관적 사실들의 집합이고 과학자가 자연을 관찰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다만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과학자란 색깔을 띠지 않은 전문 지식인으로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노출되지 않은 중립의 상태에서 우주 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한 장의 사진 원판처럼 자연에 노출시킨 다음 암실 또는 실험실에서 이미지를 현상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원자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공식이 대문자로 찍혀 나온다.
발자크나 졸라의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이면, 그 작품들이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하고 문학적 가치는 없다는 주장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이셔우드가 "나는 카메라와 같다"고 주장할 때 어느 독자도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17세기 과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저서의 주제는 지동설 즉 지구가 태양 둘레를 회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언제 이러한 사실을 그의 카메라에 찍어 담았을까? 도대체 자연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러한 터무니없는 추측을 했을까? 그리고 과연 어떤 의미에서 이 추측을 자연 사실의 중립적인 기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코페르니쿠스가 알아낸 것은 행성의 운동 궤도를,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한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간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틀에 박힌 수학적 계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지구로부터 자신을 들어올려 태양으로 뛰어든 것이다.
(중략)
1675년 뉴턴은 흑사병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전통적인 학습에서 분리된 채 17개월을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열렬하고 소년다운 기분에 잠긴 채, 어느날 갑자기 홀어머니의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의 이야기가 맞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야기의 핵심이 빠져 있다.
그 장면에서 젊은 뉴턴에게 떠오른 생각은 단순히 사과가 중력에 의해 지구로 끌어 당겨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력의 개념은 뉴턴 이전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뉴턴에게 떠오른 것은 사과 나무 꼭대기에 미치는 그 중력이 지구와 대기권을 넘어서 뻗쳐 나가야 하고 우주 공간으로 끝없이 나아갈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달을 궤도에 붙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력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뉴턴은 그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지구가 어는 정도 크기의 힘(거리의 제곱에 따라 감소한다)으로 달을 붙들고 있는가를 계산하고는 사과나무 꼭대기에서의 중력과 비교했다
그러자 두 개의 힘이 일치했다.
뉴턴은 간결하게 말했다.
"답이 꽤 잘 맞아 떨어진다". -보르노프스키, '인간과 과학 가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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