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1) - 종주시작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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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에는 참으로 좋은 선배들이 많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복일 것이다. 사주팔자를 보면 천문(天文), 천권(天權), 천복(天福)의 길운은 있는데 왜 천우(天友), 내지 천지인(天知人)은 없을까 생각해봤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주신 큰 혜택이다. 권력과 돈을 갖고 있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은 훨씬 더한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다.

유영래라는 선배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오랫동안 하며 줄곧 재야에서만 살아왔다. 지금은 민주화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이력에서 보여주듯 물욕과 담을 쌓고 사는 분이다. 요즘세태에 비춰서 '전혀 실속없이 사는 답답한 사람'일 것이다. 돈벌이측면에서 보면 가장으로서는 빵점이 아니겠느냐고 나름대로 추측해본다.

그 선배는 입만 떼면 오래전에 없어진 양반타령을 늘어놓는다. 대화하다 보면 "양반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 상놈들이나 그렇게 행동하지" 라는 말은 귀따갑게 듣는다. 어떤 때는 편한대로 갖다 붙이길래 가끔은 내가 "유선배, 양반은 그렇게 안하죠" 라며 약올리며 반격을 가하기도 한다.

유선배의 '양반론'은 "어떻게 양반들이 돈과 물질에 매달릴 수 있느냐. 나는 그렇게는 살지 않아"라는 식으로 자신의 생활력의 빈곤을 넘어가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술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유선배는 '양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최근과 같은 천민자본주의하에서는 상놈처럼 돈번 사람들이 양반행세하는 아이러니컬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양반하면 유교가 떠오르고 그러면 당연 공자가 주동인물이다. 공자도 학문은 뛰어났으나 높은 벼슬에 오르고 돈버는 재주는 없어 천하를 늘 실업자마냥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정도 학식이면 재상자리는 떼어논 당상인데 말이다. 유선배와 상통하는 대목이 있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의 학식을 소문으로 듣고 구두 면접을 봤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진법이 뭐냐"고 물은데 대해 공자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쫒겨났다. 그래서 추천해준 사람이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묻자 공자는 "자고로 군자는 병(兵)을 입에 담지 않느니"라고 답했다. 공자다운 답변이다.

유선배는 산을 너무 좋아해서 북녁산하를 제외한 우리나라 산은 대충 다 가보신 것 같다. 함께 정상에 올라서면 구름위에 서있는 신선이 저 아래 산을 내려다보듯이 주변의 연결된 산이름을 줄줄 댈 정도다. 나도 우리나라 명산을 거의 다 밟아본 편이다. 설악산 대청봉과 지리산 천왕봉, 한라산 백록담을 대표선수로 해서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치악산, 월악산, 월출산등 웬만한 거물급 산들의 정상을 올랐다.

그러나 유선배 앞에서는 새발의 피다. 나는 속으로 "우리나라 산의 이름을 저만큼 정도는 꿰어야지 이땅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신라때 산천을 주유하며 기예와 도를 닦았던 화랑무리들 그리고 조선시대 세상을 등지며 방랑을 했던 풍운객인 김삿갓을 흠모한 나로서는 유선배가 부러웠다.

나도 일요일만 되면 산에 가고 싶어 미치는 등산팬이라서 그 선배따라 자주 산에 갔다. 그 선배의 인품과 성격도 알게되면서 더 좋아하게 되었고 언젠가 그 선배가 나에게 깊은 추억을 남길 분이라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판단은 정확했고 곧 실현될 것 같다.

나도 지난 몇 년간 오랜 기자생활을 청산한뒤 정치판에 뛰어들고 또 요즘에는 사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통 만나지 못하다가 다시 연락이 닿았다. 9월 29일 소백산 국망봉을 함께 가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안타까운지 유 선배가 농담반 진담반 "나라가 어수선하니 국망봉에 가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자"며 권유해 나선 길이었다.

재수없이 비가 억수로 쏟아져 산에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도중에 봉화에 들러 한창 제철인 봉화송이를 잔뜩 먹고 저녁 늦게까지 대취한 뒤 그 다음날 영주 부석을 통해 마구령을 넘어 소백산과 태백산의 사이에 놓여있는 마대산 자락아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와석계곡 쪽으로 넘어가니 김삿갓 묘가 있는 마을이 나왔다. 1982년에야 발견되었다고 하니 한창 개발중인 모양.

조선말 풍운아 김삿갓, 본명 김병연. 시쳇말로 걸뱅이, 각설이 시인이지 뭐. 제가 볼때는 한국 최고의 재기 넘치는 시인인 것 같다. 그의 시를 보면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물씬. 하나만 소개.

제목은 '설경', "옥황상제가 죽었는가 나라 임금이 죽었는가 /산과 나무 천하가 모두 상복을 입었구나 / 해님이 소식을 듣고 내일 문상을 오면 / 집집마다 처마끝에 눈물을 흘리리라".

보너스 하나. '博 (박)' 즉 '장기'라는 시도 있어요. "술친구나 글친구들이 뜻이 맞으면 / 마루에 마주 앉아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 포가 날아오면 군세가 장해지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고 앉으면 진세가 굳어지네. /치달리는 차가 졸을 먼저 따먹자 / 옆으로 달리는 날쌘 말이 궁을 엿보네./병졸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사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 버리네." 에게게, 이게 무슨 시야. 그러나 김삿갓이 쓰면 시가 됩니까. '유명세'라고나 할까요.

이헌태도 김삿갓처럼 삿갓쓰고 지팡이 하나 짚고 전국을 주유천하하면서 자연을 벗하고 글이나 쓸까나. 이헌태가 바로 '현대판 김삿갓'이랍니다.

마구령은 오솔길 같은 허름한 고개에 불과했지만 공교롭게도 이것이 백두대간을 연결시켜주는 수많은 고개중의 하나다는 사실을 알고 큰 관심을 가졌다. 마구령처럼 이름없던 재들이 수년전 마구 불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붐을 타고 속속 산악인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헌태라는 실체를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다리 힘에 의해 한걸음 옮겨가는 다리등정은 되지 못하고 차로 오르막 구불길을 힘들게 올라간 차등정이 되어버렸지만 재를 넘는 동안 나는 유선배로부터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로 했다는 계획을 듣었다. 내귀를 의심했다. 물론 "당연 히 가야죠" 라며 단 일초도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겉 표현은 안했지만 속으로 나는 너무나 기뻤고 흥분되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남의 일로 여겼던 것, 그것도 마음속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 백두대간 종주. 참으로 가슴 설렜다. 백의민족, 단군자손, 대한민국의 남아로 태어나 금수강산, 조국강토를 한번 걸어보고 그 숨결과 내음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아쉽고 허전하지 않을까.

백두대간 종주라는 그 찬란한 대업을 이룩하는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 큰 보람이며 기쁨이겠지만 더 나아가 이땅에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과 조상님들에게 도리를 다하고 떳떳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국 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고다드가 한 말, "어제까지도 꿈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오늘은 희망이 되고 내일은 실현될 수도 있는 겁니다". 뻔한 말같지만 남의 일, 꿈만 꾸었던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려니 가슴이 마구 뛴다.

한반도의 등줄기이며 뿌리인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연결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물길로 끊어짐 없이 계속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물길을 건너면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아직 분단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갈 수 있는 코스는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진부령 향로봉 까지다. 대충 도상거리 640킬로미터, 실제거리 1200킬로미터.

주말을 이용해 매달 한번씩 산을 오르면 대략 3년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모양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감안하면 이정도 투자는 긴 것이 아니다. 인생에 있어 매우 뜻깊고 가치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인생은 '추억쌓기'라고 보는데 또 하나의 금자탑과 같은 추억이 쌓이게 될 것이다.

나는 등산을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보, 천치, 멍청이라고 생각한다. 등산은 돈 드는 것도 아니다. 예술적 경관을 지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을 등정하기위해서는 4, 5만원의 비용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런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해도 수천만원, 수억원에 해당되지 않을까한다. 그래서 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바보,천치, 멍청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이름있는 산들의 정상에 서있으면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젊은층에서 가장 부자인 그 아들 이재용씨.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거짓말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위한 것도 아니다. 진짜다.

등산내내 흘리는 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 여름날 정상에 서면 시원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상쾌함, 겨울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설경에 의해 한폭의 동양화가 그려질 때의 경이감, 그리고 사방이 탁트인 아름다운 풍경은 등산객만이 쟁취할 수 있다.

두 부자는 돈에 둘러쌓여 살고 있지만 설악산 대청봉이나 지리산 청왕봉에 올라 보고 느끼는 비경과 그 행복감을 감지할 수 없다. 이건희회장이 땀을 흘리며 한발자욱씩을 내딛어 대청봉정상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몰랐을 것이다. 정상에 올라가면 얼마나 좋은데.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 같은 느낌이다.

하여튼 일년 365일 중 이건희회장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 있다는 게 너무나 뿌듯한 느낌이다. 그래야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돈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부자들의 뒤를 쫒기보다는 내 인생의 풍요를 쫒아가야한다.

육체적으로는 건강 좋아지고 병 고치고 하체 튼튼해지고 더욱이 정력 좋아지고 피부 좋아지고 얼굴색깔 좋아지고 또 얼굴군살이 빠지면서 얼굴이 반듯해지고 얼굴윤기가 흐르고 몸매가 좋아지고 등등. 정신적으로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느끼면서 기분좋아지고 세상잡사를 잊고 스트레스를 풀면서 밝고 건전한 생각을 갖게되고 등등. 종합해 보면 '일석 10조' 더 나아가 '일석 20조'까지 갈 수 있다.

주말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소파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주말에 집에서 쉬면 그 다음주가 더 피곤하다. 주말에 등산하고 저녁 늦게 집에와서 샤워하고 잠에 곯아떨어지면 그 다음 한주가 그렇게 가뿐할 수가 없다. 그러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맹렬 기독교신자가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천국이 바로 저긴데 왜 안믿느냐.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산에 가지 않는 사람을 보면 "가보면 너무 너무 좋은데 왜 안가느냐"며 괜히 성까지 날 정도고 또 두들겨 패면서까지 데리고 가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백두대간종주를 시작하면서 나는 20년동안 사랑했던 나의 분신인 담배를 끊기로 했다. 올해초 이주일 금연열풍이 온나라를 뒤덮을 때도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는데 종주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한순간에 끊어버렸다. "담배하나 못 끊는 놈이 무슨 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나 자신에게 가혹하리만큼 채찍을 가했다. 백두대간은 인류가 사는 지구에서 봐도 참으로 소중한 자연이지만 나의 인생에서 보면 백두대간종주는 어마어마한 대사건이다.

우리나라는 긴 세월동안 유고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다. 시쳇말로 공자가 가장 잘 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공자는 산과 자연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공자도 대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자가 네명의 제자들에게 " 너희들은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의 학덕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자로는 " 대군의 침입을 당하고 기근으로 시달린다 할지라도 백성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또 도의 방향을 알도록 하겠나이다"라고 말했고 염유는 "작은 나라를 다스린다면 백성들을 풍족히 살게 할 수 있겠사옵니다"라고 말했다.

또 공서화는 "종묘의 일과 제후들의 모임에 예관차림으로 보좌하는 작은 벼슬이나 맡아보았으면 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증석은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명과 아이들 육칠명과 함께 기수의 온천에서 목욕하고 무운(舞 雲)에 올라 바람을 쏘이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는 무심결에 무릎을 치면서 "나는 증석의 의견을 따르겠노라"고 대답했다. 덕과 인의 왕도정치를 가르치기 위해 56살부터 14년간 8개국을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도 권력과 야망, 인간의 흥망과 영욕은 자연의 순리와 이치, 자연의 기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같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로 결심한 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내가 백두대간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난 뒤 이틀 뒤에 소파에 놓여진 책한권을 발견했는데 미국 애팔라치아 트레일 등정기행 소설이었다.

산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마누라가 고양시이동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책이었는데 왜 하필 그런 책을 빌렸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 전에 백두대간을 한다는 얘기도 전혀 하지 않았던 터였다. "왜 그 책을 골랐느냐"고 묻자 마누라는 "그냥 숲, 나무, 자연이 좋아서"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시점에 이책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일이었다. 신께서 백두대간을 꼭 종주할 것과 함께 "너도 이처럼 책을 써라"는 계시를 내리는 것같았다

한 친구에게 백두대간종주계획을 신나게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마누라는 뭐라고 얘기하더냐"며 반응을 물었다. 평소에도 마누라는 내가 산에 가는데 대해 별다른 말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남편에 대한 포기다. 남편의 건강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반대할 마누라가 어디있나. 나는 애당초 마누라에게 승인을 받지 않는다. 그냥 통보하면 그만이다. 큰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면 "가정을 등한시한다"며 나를 비판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주말에 산을 갈 때 마누라와 함께 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같은 일이 잘 이뤄지지 않은 것은 크게는 우리 마누라에게 책임이 있다. 산을 좋아하면서 주말에 가정을 비우는 일이 많은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가정을 팽개쳐 놓고 산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바다. 마누라가 백두대간에 따라 나선다면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너무 변명으로 일관했나.

물론 인류의 역사는 탐욕과 이기의 발로에 의해 흘러왔다고 하지만 변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독재자나 폭군들도 다 자기를 항변할 논리를 갖고 있었다. 히틀러도 우생학적으로 우수하다고 우기며, 게르만의 순수혈통을 보존해서 탁한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다.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되는 황당한 것들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식해야할 핵심포인트는 부부간에 취미가 같으면 훨씬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고 공통점이 없다면 앞으로도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미혼남녀 여러분 결혼할때는 취미가 같은 동반자를 구합시다. 매우 귀담아 들어야할 애기입니다. 설악산 정상을 오를 때 60대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등산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아름답다. 나도 그런 날이 언제 오려냐.

실제로 제가 대청봉정상부근에서 만난 노부부는 서울에서 한달에 한번꼴로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는데 대략 100번정도는 왔다고 하네요. 매달 간다고 해도 일년이면 12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구만. 노인들이 헥헥하며 지치지도 않고 젊은 사람들 보다 더 잘 산을 타더라구요.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격찬을 아끼지 않는 설악산, 그 설악산을 그렇게 다녀왔으면 죽어도 여한은 없겠구만. 그 노부부가 죽어서 천당갈지, 못갈지는 몰라도 살아서는 완전 천당가운데 상천당에서 살았구만.

사실 한국에는 백두대간이 있지만 미국에는 애팔래치아트레일이 있다. 동부지역 애파래치아산맥의 조지아주에서 메인주까지 14개주를 관통한다. 광활한 미대륙에서 알수 있듯이 애팔래치아 종주에 걸리는 기간은 보통 5개월이고 5백만번의 걸음을 내딛어야한다. 매년 3월초와 4월말사이 2천여명의 등산객이 도전하지만 종주에 성공한 사람은 고작 10%밖에 되지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더 많은 산악인들이 도전하고 성공을 거둘텐데라는 생각을 해봤다. 미국사람보다 한국사람이 산은 더 잘 타고 좋아하니까.

작자인 빌 브라이슨이 미 애팔래치아 트레일(3520킬로미터)에 도전하면서 겪었던 대자연과 인간들의 만남을 기행문으로 엮었는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치고 너무나 운명이었다. 빌 브라이슨도 결국 1392킬로미터를 주파해서 총 길이의 39.5%밖에 가지 않았지만 그는 책 끝에 "우린 시도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고 맺음말을 했다.

철저한 종주를 실천하지 못했으면서도 '사실상의 종주'로 선언하는 억지를 부렸지만 어쨌든 그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 한 획을 긋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같이 되지 않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 향로봉까지 1미터도 빠지지 않고 걸을 것임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인연도 특이했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에서 20여년간 타임스와 인디펜던트지에서 기자생활을 한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도전한 것인데 나의 경력도 같은 기자였다. 묘한 매력을 느꼈으며 책을 잡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독파해버렸다.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이책은 뉴욕타임스 3년 연속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책 내용은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너도 이런 책을 쓰라"는 엄중한 계시를 받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백두대간 첫 출발일로 삼은 10월 6일, 유선배로부터 우천과 준비미비로 일정이 연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쉬웠지만 큰 일일수록 서둘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여튼 백두대간 종주는 의미를 너무 크게 부여하는 것같지만 내 인생의 또다른 출발이다.언젠가는 북녁땅끝까지 계속 걷는다는 생각에 미치자 어리아이처럼 마냥 기쁘고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운이 따른다면 우리가 북으로 계속 나아 가는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그사이에 남과 북이 서로 내왕이 가능했으면 한다.

어쨌든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1400킬로. 기자, 정치인보좌관을 거쳐 자그마한 회사의 사장으로의 변신을 거듭한 있는 가운데 백두대간의 등정은 나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으로 확신했다.

백두대간. 그 자체가 감동이고 환희다. 이제 내가 백두대간 앞에 당당히 서있다. 결코 꿈이 아니다. 오. 시작과 완성되는 그날, 그날이여 하루빨리 다가오라. 그 백두대간을 겸손하게 기쁘게 기품있게 오르리라. 그래서 인간 이헌태의 기상과 웅지를 맘껏 뽐내리라. 끝내 백두대간과 내가 하나가 되리라. 나 죽은 후에도 내 영혼과 이름이 백두대간에 남으리라.

한비야가 '바람의 딸'이라면 이헌태는 '바람의 아들'이 되리리. 죽어서 바람이 되어 백두대간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싶다. 우주가 운명을 다하고 마칠때까지.

역사적인 백두대간종주의 첫발을 내딛기 직전의 이헌태의 마음, 마침내 해야할 일, 가야할 길을 찾았구나. 선불교의 시가 불현듯 생각난다. " 나 도착했네, 고향에 왔네 / 나 여기있네 지금있네 / 나 굳건하네 자유롭네 / 나 궁극의 진리에 머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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