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국가였던 신라(新羅)는 통일후 예술의 중흥기를 맞으며 석탑과 불상 등 화려한 석조유물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경주를 대변하는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주에도 신라 이후 유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이 가운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친 경주읍성(邑城)은 대표적인 탈(脫)신라 문화유적이다.
신라 유물들로 가득한 경주에서 경주읍성은 오히려 이채로운 느낌을 갖게 할 정도. 아쉬운 점은 신라의 수많은 유물에 가려진 경주읍성이 본래 가치보다 낮게 평가돼 복원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와 문종실록 등에 따르면 읍성은 고려 8대 현종 3년(1012년)에 처음으로 축조됐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유적들이 통일 후 문화적 욕구에서 비롯됐다면 고려때 축조된 경주읍성은 군사적 방어목적으로 세워진 것.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한 신라는 통일후 넓어진 행정구역을 관리하다보니 읍성을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왜구들의 잦은 침략으로 주민들의 원성이 드높자 방어와 효과적인 치안을 위해 읍성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는 읍성의 성벽 둘레는 679보 혹은 4천75척이며, 높이는 12척. 성안에는 우물 80기와 연못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벽 밖의 해자(垓子)는 둘레 5천96척이며 사방에 성문이 있는데 동문은 향일문, 서문은 망미문, 남문은 징례문, 북문은 공진문이 있어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윤이 읍성 내에 위치, 동남해안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징례문 남쪽 봉황대 근처 종각에 걸려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같은 경주읍성이 완벽하게 복원된다면 경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띨 것임에 틀림없다.
경주시는 동부동의 일부 남은 읍성터 등 매년 부분적인 보수를 실시하고 있지만 철저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성벽 축조의 일반적 유형은 아랫부분을 자연석 큰바위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큰돌과 쐐기돌로 틈새를 막아 자연미가 그대로 묻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 그러나 복원된 읍성은 균일한 돌로 담장을 쌓듯이 했고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 원형이 파괴됐다.
또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읍성의 성벽은 인근 슬라브담장과 연결돼 있고 공터는 주차장으로 방치되고 있다.
경주시가지 발전연구소 김성수(金性洙.60)소장은 "원형대로 복원한다는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나마 존재하는 부분은 충분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며 "없어진 석재는 그 자리에서 발굴과정을 거쳐 복원하는 등 자료검토를 통해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로 향토사학자 김태중(金泰中.73) 경주시문화원장은 "경주읍성은 수차례 외적 침입이 있을 때마다 적의 포화를 한 몸에 받으면서 제역할을 다해왔다"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은 왕궁과 도성인데, 경주읍성의 존재 자체를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셈"이라고 했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은 읍성에 대한 정비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번 기회에 올바른 고증에 따라 복원된 읍성이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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