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또다시 한 해의 맨 끄트머리에 와있다.
지구촌의 60억 인구 누구에게나 한치의 어김없이 똑같이 오게될 그 시간을 모두들 아쉬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묘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연전에 한국인이 가장 즐겨부르는 애창가요로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선정된 적도 있지만, '세월'이란 단어는 언제나 그렇듯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는 세월' 보다는 '가는 세월'이 더 잘 어울리고, 그래서 태생적으로 아련한 상실감을 갖게 하는 단어이다.
연말마다 찾아드는 미열같은 허허로움은 아마도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아쉬움이 마음 저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일게다.
해가 갈수록 더 젊어지고, 더 싱싱해진다면 '세월'은 기쁨과 환희의 이미지로 바뀌어지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이니 그저 야속한 감정부터 들게 되나보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서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높은 풍류다인(風流茶人)이자 조선의 두보(杜甫)로 일컬어질 만큼 조선조 최고의 시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 1845).
자하선생이 73세이던 어느 날 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노년의 선생을 돌보기를 간청하였다.
그때 선생은 자신의 연로함을 들어 여인의 청을 정중히 사양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는데 요즘 사람들도 깜짝 놀랄만큼 생각이 트였다.
'그대, 이 사람의 나이를 묻지 마시오. 오십년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佳人莫問郞年機 五十年前二十三)'. 참으로 나이에 대해 흐르는 강물처럼 담담할 수 있다면 그만큼 잘 산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이 한 해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흙덩이가 정원사의 삽 끝에 달라붙어 있듯 시간은 역사가의 생각에 달라붙어 있다"고 했지만 시간이야말로 우리들의 생각 끝에 달라붙어 있는 것 아닌가. 잔 속의 물을 두고 "애개, 요것밖에"하는 사람과 "아직도 이만큼이나"하는 사람과는 삶의 질이 천양지차이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ronos)는 이 한 해도 그렇게 화살처럼 날려버렸지만 삶을 디자인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카이로스(Kairos)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제 2003년은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불현듯 석양이 서럽도록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또 한 해의 저묾에 가슴이 아려질 것이다.
그럴 때 이해인의 시 '12월의 기도'를 나직이 읊조려보면 좋을 것 같다.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전경옥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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