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모두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거창한 목표를 세운다.
올해는 큰 계획보다는 목표의식을 버리고 천천히 살기를 권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좀 여유있게 또 너그럽게 천천히 살면서 내 삶에 귀 기울이는 한 해를 만들어 보자고 한다면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특히 속도가 경쟁인 디지털시대에….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강력한 목표의식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뛰는 대신 걷고 카페인이 든 커피를 마시면서 억지로 깨어있기보다는 알코올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긴장을 풀라고 했다.
한마디로 삶을 즐기려면 속도를 줄이라고 주문했다.
속도를 줄이는 삶. 느림의 삶은 사실 쉽지만 않다.
남보다 한발 앞서야 직성이 풀리고 남보다 더 빨라야 유능하고 실력 있는 이로 받아들여지는 우리사회에서 '느린 삶'은 정말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속도에 길들여진 현대인
지난해 틱낫한 스님이 대구를 방문 했을 때 그를 동행한 취재 기자가 겪은 힘겨움은 '천천히 하기' 였다.
스님의 속도에 맞추어 정말 열심히 최대한 천천히 먹느라고 먹었는데 틱낫한 스님은 그때까지도 첫 숟가락을 아직도 끝내지 않았더라면서 "정말 여유 있는 삶은 아무나 즐길수 있는게 아닌 것 같다"며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이처럼 느림이 오히려 힘들 만큼 속도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번영과 선진을 따라잡기 위해 시간적 압축을 추구해왔다.
이런 '압축적 성장' 속에서 느림은 부정적인 것이며 속도에 뒤처지는 삶은 인생의 패배자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왔다.
속도로 이룬 경제성장 뒤에는 황폐화된 몸과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과정 없이 결과만 중요시하면서 살아왔던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가족도 내팽개친 채 일만 해왔던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나의 마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남의 소리에만 온 신경을 쏟아왔던가.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되물어 볼 일이다.
무너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지하철 참사…. 모두가 과정보다는 오로지 결과에 집착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끊임없이 속도에 인생을 던지면서 살아온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새삼 느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속도에 떠밀려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온 우리에게 속도는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으며 얼마나 윤택한 생활을 제공했는 지 되묻고 싶다.
시간을 줄이는 갖가지 기기들이 앞다투어 나오지만 그 남은 시간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여유로움을 주었는가.
'자연의 속도'로 돌아가자
지구촌 곳곳에서는 속도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을 자연의 상태로 되돌리자는 '슬로 라이프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내달려 온 길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여유를 갖고 길옆의 산을, 풀 섶의 이름 없는 들꽃을, 또 이름 모를 산새 소리에 마음을 열어보자는 움직임이다.
'슬로시티'를 시의 슬로건으로 내건 일본의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 이 도시의 시계는 어느 도시 보다 한가롭다.
도시를 천천히 달리는 느림버스는 주행속도가 시속 16㎞. 보통시내버스의 절반 또는 3분의 1속도다.
성질 급한 사람은 차라리 뛰어 내릴 정도다.
이 같이 지구 곳곳에서는 자연의 속도로 돌아갈 것을 부르짖고 있다.
문명의 속도에 쫓겨 나를 잊고 산 것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며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다.
올해는 고속철이 개통되면서 속도의 매력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1시간 40분. 가히 속도의 매력은 뿌리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다.
속도가 갖는 힘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이 시대에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유지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속도에 흔들릴 때마다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면 어떨까."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김순재(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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