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리던 때가 있었다.
개화와 일제, 6.25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모든 이가 춥고 배고프던 때였다.
그 때는 모든 것이 타기(唾棄)와 청산(淸算)의 대상이었다.
가난과 핍박의 역사를 불러온 정치, 경제,사회 제도, 문화적 자존심 마저 내던져 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들이었다.
산과 강을 밀어 공단을 짓고, 초가를 부수어 슬래트 지붕을 올리고…또 벽돌집으로, 아파트로, 주상복합으로…끊임없이 헐어내고 짓는 일을 되풀이하며 달려온 50년이었다.
무너지는 초가와 함께 그 옛날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골목길이며, 그곳에 얽힌 어린시절의 추억들도 흩어져 갔고, 수십년 처마를 맞대고 살던 공동체와 오랜 세월 낡은 가치규범을 지켜온 아버지.어머니들의 문화적 자존심도 함께 무너져 갔다.
'생존의 위협'이라는 방식으로 변화와 혁신이 강요되던 시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5천달러를 넘어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삶의 질'을 생각하게 되면서 환경의 중요성과 '느림의 미학'이 관심을 끌게 되고, 우리것 가운데도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는 깨달음, 그 잃어버린 가치들에 대한 향수와 자존심 같은 것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늘상 만나던 옛것들이다.
새것은 경이와 흥미를 유발할 지는 몰라도 마음의 휴식과 안도(安堵)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언제나 현존(現存)이다
그러나 한번 집단학습된 슬로건은 오랜 세월 살아 남는 것이어서 아직도 우리에겐 '변해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를 외치면서,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를 묻지않는 습성이 남아있다.
최근 급진 정치세력이 추진하는 개혁 드라이브에 편승, 사회 각 부문에서 지난 시대의 슬로건들이 양산되고 있다.
"모든 구세대가 개혁의 대상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과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사오정'과 '오륙도'와 같은 이기적인 세대교체의 슬로건까지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변화와 혁신은 더이상 가치가 아니며, 맹목적인 과거부정은 그 스스로 이미 지난 시대의 이념일 뿐이다.
때마침 유럽에서는 느긋하게 삶을 즐기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는 '다운시프트'(Downshift:저속기어로 바꾼다는 의미)족(族)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벤츠 승용차나 디지털 가전품 못지않게 귀중한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에 금전적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스트레스가 적고 자기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직장을 찾거나, 한적한 시골이나 휴양지로 사는 곳을 옮기는 이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사회도 변화의 속도에 한번쯤 '브레이크'를 걸고, 과연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이 옳은 지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를 변화로 내모는 것은 더 이상 '생존의 위협'이 아니지 않은가? 선진사회의 분방하고 열린 생각이 부럽기만 하다.
여칠회 (imaeil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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