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의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혼돈이었다.
2004년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하지만 2004년의 혼돈은 2003년의 혼돈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2003년이 낡은 것이 무너지는 해였다면, 2004년은 새 것을 세워내는 해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2003년과 2004년은 '이행과 전환'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이행과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이행과 전환은 본질적으로 위기일 수밖에 없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로운 것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라는 그람씨적 의미에서도 위기(crisis)이지만, 영원히 새로운 것이 자리잡지 못하고 끝없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risk)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위기인 것이다.
◆2004년은 이행과 전환의 시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돈과 진통도 이행과 전환의 사회가 치러야 하는 불가피한 몸살이고 위기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빨리 이 혼돈과 진통과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빨리 이겨내고 새 것을 세워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선진 사회로 진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사회는 불치의 중병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경제 부문의 이행은 한마디로 '산업경제 체제에서 지식기반경제 체제로의 이행'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와 노동력이 중심인 산업생산체제에서 정보와 창의력이 중심인 지식정보산업체제로의 전환'이기도 하고,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집중과 규모의 경제가 관건이었던 포디즘체제에서 유연성과 네트워크가 관건인 포스트포디즘체제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의 공간적 배치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세계화가 변화의 한 축이며 지방화는 변화의 다른 한 축이다.
자본과 상품과 생산활동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넘나들고, 세계의 각 지방들끼리 직접 교류하고 경쟁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식정보산업체제로의 전환
역사적 이행과 전환의 도전에 응전해야 하는 주체는 각각의 지역사회들이다.
중앙정부가 끄는대로 끌려 다녀서는 밝은 미래를 열 수 없다.
지역의 정치권과 행정과 기업과 대학이 머리 맞대고 지역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설계하면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지역사회 안에서도 대학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먼저 이행의 방향과 전환의 의미를 통찰해 내는 것은 대학의 고유 역할이다.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꼼꼼히 챙기는 것도 대학이 할 일이다.
권위주의정권 시절에는 그런 일까지도 정치권력과 행정이 도맡아 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으로 낡은 방식이다.
중앙집중 권력으로는 지금의 혼돈과 진통과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없다.
특히 미래의 사회와 경제가 정보화사회이고 지식기반 경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다가오는 지식기반경제 체제에서는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느끼고 판단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보화사회와 지식기반 경제체제의 경쟁력을 좌우할 새로운 지식과 정보와 기술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일도 물론 대학의 역할이다.
◆지역사회에서의 대학역할 중요
그런 점에서 세계화-지방화 시대에 지역경제의 회생과 혁신을 위한 지역 대학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동안 지역 대학의 역할은 낙제점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먼저 대부분의 지역 대학들이 대구경북의 경제와 정치, 문화에 관심이 없었다.
지역 대학들의 최대 관심은 학과 많이 만들고 학생 정원을 많이 배정받아 학교 규모를 키우는 일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학생 수는 대학의 재정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질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리와 전횡이 거리낌 없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지역의 대학들이 지역사회의 자랑이기보다는 지역민의 짐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흔히 대구를 교육도시라 하고 경북을 학문의 고장이라 하지만, 과연 대구와 경북이 지역의 대학들 덕분에 교육과 학문에서 앞서 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경산시의 경우는 전국에서 대학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대학도시라고 하지만, 과연 경산시민들이 경산권의 대학들로부터 어떤 지적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일부 지역 대학들에서는 학생들 등록금을 빼돌리는가 하면, 건설공사 때 이중장부를 만들어 교비를 횡령하는 사고가 빈발하였다.
아예 재산 불리는 방법으로 학교를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대학들에서 교권과 학습권이 지켜질 리 만무했다.
◆지역대학 혁신 필요
교수들도 지역의 사정과 관계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혹은 추상적인 이론에만 매달리기 일쑤였다.
물론 전공 분야에 따라서는 추상적인 연구 과제들에 매달려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현실 유관성이 높은 분야의 교수들마저도 지역의 현실에 등돌리고 앉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의 기업들이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고민하지 않았으며, 졸업 후 지역에서 생활할 학생들에게 지역사회에 대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상아탑이란 허울과 학과이기주의에 갇혀 지내면서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는 경우도 흔했다.
이제 지역 대학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지역사회와 지역 경제도 희망을 일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지역 경제가 무너지고 지역사회가 침몰해서는 지역 대학들도 생존할 수 없다.
지역 대학과 지역 경제, 그리고 지역민 모두를 위해 지역 대학이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관행 탈피한 정체성 확립이 과제
첫째, 지역 대학들은 지역혁신의 중요한 주체로서 손색이 없기 위해 먼저 도덕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덕적 리더십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지역의 기업을 비롯해 지역사회의 중요한 주체들에게 변화와 혁신을 요구할 수 없다.
도덕적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리와 전횡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권과 학습권이 살아있고 교육정의가 구현되지 않으면 안되며, 대학 경영은 더욱 투명해져야 한다.
둘째, 대학들은 '지역사회의 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역사회의 공적 자산'이라는 인식 위에서 '지역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지역의 기업과 행정과 시민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정보와 인력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공마다 지역사회의 실상을 연구하고 문제 해결방안을 제공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
전공마다 지역의 기업들과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과정도 개편해야 한다.
산학민관 협력 사업을 적극 개발하면서 지역밀착 경영을 전개해야 한다.
지역의 기업이 의지할 수 있는 대학, 지역민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대학, 지역사회의 대학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지역의 대학들 모두 그간의 나태와 해이에서 벗어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제 지역 기업의 기술력, 지역사회의 문화 역량, 지역민의 의식과 복지 수준, 그리고 지역사회의 혁신 역량은 지역 대학의 경쟁력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지역의 대학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방만한 편제에서 벗어나 특성화에 박차를 가해야 하고 구조조정도 서둘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방대학 육성을 위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투자가 확대되어야 하며, 지역 기업들도 지역 대학에 대한 후원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넷째, 지역민을 위한 평생교육기관의 역할도 크게 강화해야 한다.
산업 기술이 워낙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지역의 정치 행정 문화 등 모든 분야도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평생을 걸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근로자와 임원들도 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야 하며 공무원들도 끊임없이 재교육받아야 한다.
학교 선생님들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실무자들도 늘 재교육받아야 하며, 주부들도 항상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지역의 대학들은 지역의 기업과 각계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기술과 지식과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지역의 대학들이 지역 경제와 지역민의 복지에 궁극적인 책임을 진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 경영자와 교수, 학생 모두가 자기혁신을 서둘러 지역사회의 혁신적 발전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홍덕률 대구대학교 교수.사회학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트럼프, 중동상황으로 조기 귀국"…한미정상회담 불발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