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4대 임금 광종(光宗:재위 949~975)이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를 만난 것은 재위 7년(956)의 일이다.
쌍기는 후주의 사신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수행해 고려에 왔다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제때 귀국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있었다.
"고려사절요"는 두 사람의 만남을 "병이 낫자 왕이 불러보니 응대하는 것이 '왕의 뜻'에 맞았다"고 적고 있는데 '왕의 뜻'이란 바로 광종의 개혁의지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정상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호족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장인이거나 개국공신인 호족들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2대 혜종은 대광 왕규(王規) 일당이 벽을 뚫고 침실에 침입해 암살을 기도했어도 처벌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3대 정종도 개경을 장악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경(西京:평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의 보위를 물려받은 광종은 스물 다섯의 연부역강한 나이답게 의욕에 넘쳤다.
전왕들에 비해 권력기반도 튼튼했다.
정종을 후원했던 서경세력과 처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두 명의 부인 중 동부이복(同父異腹) 형제였던 첫째 대목왕후 황보씨는 황주(黃州)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으며, 둘째 경화궁 부인 임(林)씨는 광종의 이복형 혜종의 딸이었다.
왕건의 아들이었던 광종은 태조와 혜종, 정종의 유산을 골고루 계승했던 것이다.
시행착오를 되풀이
그러나 즉위 초의 광종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했기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즉위 직후 대광 박수경(朴守卿)에게 개국공신들을 4부류로 나누어 쌀을 지급하게 한 것이나 '성군(聖君)'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시행착오의 예이다.
즉위 원년(950) 정월 큰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자 사천대(司天臺:관상대)에서는 '덕(德)'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언했고, 광종은 이에 따라 당나라 오긍(吳兢)이 지은(정관정요.貞觀政要)를 숙독했다.
"정관정요"는 막강한 왕권을 가졌지만 신하들의 간쟁을 잘 듣는 태종의 덕을 칭송하는 책이었다.
광종이 "정관정요"에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미약한 왕권의 광종이 신하들에게 베푸는 '덕'은 그들의 전횡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는 바로 '독(毒)'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족들은 일반 양민들을 노비로 전락시켜 사적(私的)으로 지배했다.
이런 호족들의 간쟁을 잘 듣는 '성군'만큼 백성들에게 '폭군'은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신하 모두가 개국공신이요 호족이었던 광종은 어떻게 해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지를 몰랐다.
쌍기를 만나기 전 광종이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취한 유일한 조치는 식회(式會)와 신강(信康) 등을 파견해 지방 주현이 중앙에 바치는 세공(歲貢)의 상한액을 정하게 한 것이었다.
이는 호족들의 과도한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법치가 개혁
이런 상황에서 쌍기가 광종에게 제시한 방안은 법치를 통한 개혁이었다.
광종 7년(955)의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 그 대표적이다.
'태조가 나라를 창업하던 초기에 장사(將士)들 가운데 노비가 없던 자들이 혹은 종군(從軍)하여 포로를 얻기도 하고, 혹은 재화로써 사기도 했는데 태조는 일찍이 포로들을 석방시켜서 양인(良人)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공신들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하여 편의대로 따르도록 했다.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시비를 가리도록 하니 공신들이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 광종 7년조)'
노비로 전락한 양인들을 조사해 과거신분을 되찾게 한 노비안검법은 공신들의 원망을 산 반면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고려사" 열전 후비조는 "당시 종으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많았으며 윗사람을 무시하는 기풍이 성행했으므로 사람들이 다 원망했다.
(대목)왕후가 간절히 왕에게 간했으나 광종은 듣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호족들의 집요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광종은 재위 9년(958)에는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시험관)로 삼아 과거제를 실시해 호족들에게 다시 타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벼슬은 개국에 참여한 공신과 호족들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과거제로 등용된 관료들과 나누어야 했다.
관료들은 국왕에게 충성했고, 자연히 왕권은 강화되었다.
광종 11년(960)에는 백관의 품계에 따라 자삼(紫衫:자주색)부터 녹삼(綠衫:녹색)까지 다른 색의 옷을 입는 공복(公服)을 제정했다.
이는 신하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지만 나아가 군주와 신하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계선(界線)을 긋는 효과가 있었다.
개혁의 성과와 호족들의 반발
재위 11년 광종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개경(開京)을 황도(皇都),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라고 고치고 준풍(峻豊)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자신이 황제라는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광종은 본격적인 호족 숙청에 나섰다.
재위 11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발하자 이들을 내쫓았다.
대신들을 축출한 것에 호족과 공신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충성스럽고 현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였으며 노비가 그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게 되어 임시 감옥까지 생겨났다.
죄없이 죽는 자가 계속 생겨나고 시기하는 버릇이 날로 심해져갔다.
왕실 일족들도 많이 잡혀 죽었는데 왕은 외아들 주까지 의심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서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고려사" 광종 11년조).
광종 6년(955)에 태어난 외아들 주(5대 경종)는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광종의 개혁에 비판적인 호족들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는데 그가 성종 때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광종 말년)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장수들이 죄다 죽임을 당해 경종이 즉위할 때 옛신하로서 생존한 자는 40여 인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족들의 타격은 백성들에게는 이익이었다.
광종의 외국인 수입
쌍기가 건의한 정책들은 그가 후주에 있을 때 국왕이었던 후주의 태조(太祖:952~954)와 세종(世宗:954~959)의 정책과 비슷한 것이었다.
후주의 세종 역시 호족들이 불법탈점한 토지를 유망 농민들에게 되돌려주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들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외국인 등용을 주저하지 않았던 국제주의자 광종은 쌍기 이외에도 많은 외국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재위 10년에는 쌍기의 부친 쌍철(雙哲)까지 고려에 귀화했다.
당연히 외국인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고려 지배층들의 시각은 비판적이었다.
'…멀리 중국 남방과 북방의 용렬한 사람들(南北庸人)까지도 특별한 예로써 대접하니 이 때문에 젊은 무리들이 다투어 진출하고 옛 덕망 있는 사람들이 점차 쇠진하였다.
…중국의 선비는 예로써 대접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전).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외국지식인들의 정책이 도움을 주었다.
광종이 외국인들에게 신하들의 집과 고려 처녀들까지 내려주었던 것은 이들의 정착이 고려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 외부수혈로 시작한 광종의 법치개혁으로 많은 양인들은 과거 신분을 되찾았고, 국가 세수는 늘어났으며, 왕권은 강화되었다.
광종의 개혁은 고려가 정상적인 왕조국가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열린 마음이 개혁마인드
광종의 외국인 수입은 오늘날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오늘날 쌍기처럼 한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외국학자들은 한국경제가 선진국으로 나가기위해서는 국제수준의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역시 국제기준의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가 필수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인들이 투자를 꺼리고 국내 기업이 너도나도 해외로 탈출한 결과 일자리가 줄어들어 결국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현 상황의 주요인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있다.
이런 상황의 타개를 위한 개혁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그로 인해 고용시장에서 탈락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의 구축에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호족화한 일부 대기업 노동세력의 반발이 두려운 나머지 '일자리 창출'이라는 캠페인성 립서비스만 되풀이하며 광종같은 악역은 맡으려 하지 않는다.
광종이 대목왕후의 간청까지도 물리치며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지 않았던 들 많은 양인들은 계속 노비신세를 한탄하며 울었을 것이다.
오늘 일자리가 없어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현 정부가 쉬해야 할 개혁 조치는 너무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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