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가 문수암에서 바라보니 마치 섬 두 개가 짝짓기 직전의 뱀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붙은 사량도에는 상도와 하도, 두 개의 섬이 있다. 하도에는 7개의 산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는 칠현산이 있고, 상도에는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친 장대한 지리산이 바라다 보여 '지리망산'이라 애칭되다 아예 이름도 같이 불리는 지리산이 있다.
지리산은 불모산, 가마봉, 옥녀봉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종주를 할 경우 빼어난 암릉과 기암괴석이 지천에 늘려 있는 종주로가 7km 가까이 계속돼 산악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섬에서의 산행은 뭍의 산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어느 쪽을 봐도 그림같은 바다와 보석같은 섬들이 산행 내내 한 눈에 들어온다.
상도의 북서쪽 끝마을 내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아담한 내지마을을 지나 최근에 생긴 '귀우정사' 바로 뒤에 있는 산길로 접어든다. 각 산악회에서 단 표식이 나뭇가지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초입부터 제법 가파르고 한 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다.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푹신한 길을 연출하는 산길을 20여분간 지나면 입었던 점퍼를 벗게 되고 장갑 낀손에 땀이 잡힌다. 다행이 평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웬걸 좀 숨을 돌렸다 싶더니 눈앞에는 집채만한 바위덩어리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암벽 등반하듯 바위를 오르니 땅으로만 향하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진다. 뭍에는 날씨가 추워진다더니 산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다. 바다는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는가? 1월에 핀 진달래라니...
돌길을 잠시 가니 자그마한 솔숲이 나오고 솔숲을 벗어나자 능선이다. 능선에 오르자 바다가 발 아래에 펼쳐진다. 한쪽만이 아니다. 사방이 바다다. 북쪽으로는 사천시와 통영시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다도해의 꿈같은 풍광이 이어지며 돈지항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숨이 차서 멈추기 보다 시선이 먼저 발을 잡는다.
섬산행의 묘미가 이런 것일 것이다. 갯마을 냄새가 실린 해풍이 땀을 식혀주고, 기암괴석위에서 실루엣으로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햇살에 반사된 바다와 함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 놓는다. 섬북쪽에는 올라온 내지마을이 까마득히 보인다. 계단식 논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푸른 바다와 이어져 평화롭다. 날씨가 맑지 않아 섬들이 옅은 안개속에 갇혔다.
가까이서는 진하고 멀어질수록 옅어지는 섬모습이 담채화를 보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이 섬이 떠 있다고 하는 지 알 것 같다. 옅은 해무 속 섬은 바다와 하늘 경계 없이 그렇게 떠 있다. 다시 능선을 타고 지리산 정상으로 향한다. 대부분 바위길이다. 좌우로 절벽인 칼날같은 능선이 20여분간 이어진다. 저절로 발에 힘이 들어가면서 몸을 바짝 낮추게 된다.
지리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행은 숲길과 암벽, 칼날 능선 등이 적당한 긴장과 이완을 주는 기가 막히게 좋은 등산코스다. 마치 노트를 책장에 겹겹이 꽂아 놓은 듯한 바위를 20여분간 지난다. 바위에 복사된 햇빛의 열이 땀 흐른 얼굴을 간지럽힌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난코스가 나타난다. '위험구간' 마다 우회로가 따로 있다. 백척간두 끝에 서는 기분으로 위험구간을 오른다. 조심스레 오르니 저절로 탄성이 난다. 지금껏 지나온 봉우리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낙타 등같은 봉우리 뒤로 다도해가 펼쳐진다. 깎아지른 바위 벼랑위에 한 그루 노송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지리산 정상에 오른다. 어느새 안개가 걷혔다. 4백미터도 안되는 산이지만 여느 뭍에 있는 산에 비해 경치가 뒤지지 않는다. 역광에 눈부신 남해바다를 보노라면 훅 빨려들 것 같은 현기증을 느낀다. 섬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한 점 파도 없는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하늘빛과 물빛이 섞여 경계가 없다.
정상에서 여유를 가지고 바람을 맞으니 신기하게도 남쪽에서 부는 해풍은 온기를 지니고 있고, 북쪽에서 부는 바람은 차갑다.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 산행이 아니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옥녀봉까지 빠듯하게 산행을 계속하는 것도 좋겠지만 섬 일주를 하고 난 뒤라 마지막 배 시간에 맞춰야 한다. 쉬엄쉬엄 왔던 길로 하산한다. 하산 길은 오를때보다 훨씬 여유롭다. 넉넉히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미쳐 못 봤던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사량도 섬 일주와 지리산 산행의 대미는 일몰이다. 겨울철 마지막 배 시간은 오후 5시 반.
딱 일몰과 맞아 떨어지는 시간이다. 터미널이 출발전부터 붉게 물든다. 정박해 있는 배들도, 방조제도, 사람도 모두 붉은 색이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배시간에 맞춰 우르르 몰려 나온다. 모두 정장차림이다. 섬마을과 정장차림이 어색하다. 가오치터미널행 배가 출발하니 돈지쪽으로 해가 기운다. 사량도에서 멀어질수록 해는 산쪽으로 기울고 여객선이 만든 물살위로 낙조가 더욱 짙어진다. 배가 방향을 틀자 해는 지리산 뒤로 넘어간다. 짧은 여정이지만 일출과 일몰을 배위에서 다 보는 행운을 가졌다. 사진.글 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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