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 사이의 투쟁이다"라는 말은 개인과 국가, 사회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개인과 국가, 사회는 타방(他方)과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소멸한다.
협력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싸워야 할 때가 더 많았던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그래왔다.
때로는 협력 속에서 서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불가피하게 투쟁할 때도 많았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지나(支那:중국)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쇠퇴로 한반도의 통일기운이 높아가자 중국과 '역사전쟁'이 벌어지는 근본 원인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고구려가 중국과 충돌했던 것은 신채호의 말대로 중국과 고구려가 '양대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만주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을 '호태왕(好太王)'이고 표현했다.
왕(王)자 앞에 '클 태(太)'자를 쓴 이유는 고구려 임금은 왕을 다스리는 왕, 즉 황제라는 뜻이었다.
'태왕(太王)'이란 황제라는 뜻을 고구려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국 황제가 스스로 천자(天子)를 자칭했던 것처럼 고구려 태왕 역시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고 천자를 자칭했다.
고구려가 수.당(隋.唐)과 싸우는 고-수, 고-당대전은 천하에 두 천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일류국가는 하나여야 했기 때문이다.
*중원대륙의 통일
후한(後漢)이 쇠약해지면서 중국은 삼국지(三國志)의 시대를 거쳐 오호(五胡) 16국 시대, 위진(魏晋) 남북조시대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369년 동안 계속되었던 중원의 분열은 북주(北周) 출신의 양견(楊堅:문제)에 의해 끝이 났다.
수 문제는 581년 수(隋)나라를 건국한 지 불과 8년 만에 통일을 달성하는 괴력을 보였다.
그 시기 고구려 국왕은 평원왕(平原王:559~590)이었는데, 그는 분열시기 이이제이(夷以制夷) 전략으로 중원을 상대했다.
'삼국사기'가 "담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평원왕은 재위 23년(581) 수(隋)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사신을 보내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양자강 남쪽의 진(陳)에도 사신을 파견해 남북조의 분열을 국익 극대화의 계기로 활용했다
수 문제 역시 통일 전인 584년에는 고구려 사신에게 대흥전(大興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로 우대했다.
그러나 589년(평원왕 31년) 중원 통일을 달성하자 자세가 달라졌다.
고구려를 수의 세력권에 넣으려고 한 것이다.
평원왕 역시 수의 중원통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서(隋書)" 고구려전에는 "개황(開皇:수 문제의 연호) 초에는 입조(入朝)하는 고구려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진(陳)을 평정한 뒤로는 탕(湯:평원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원왕은 수의 통일이 '양대 세력'의 충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 속에 등장한 영양왕
설상가상으로 평원왕은 수의 통일 이듬해인 서기 59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원왕의 맏아들 영양왕(590~618)이 즉위했으나 그 누구도 영양왕이 이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의 왕권은 약했고 지배층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수상인 대대로(大對盧)의 선임권도 귀족 자신들에게 있었다.
"고구려의 관제 중 가장 높은 것은 대대로로서 중국의 1품(品)과 비슷한데, 국사의 전반을 총괄한다.
임기는 3년이지만 적합한 자라면 연한(年限)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 서로 복종하지 않으면 서로 군사를 동원해 싸워서 이기는 자가 대대로가 된다.
귀족들이 서로 싸울 때 왕은 다만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이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구당서(舊唐書)'".
각기 사병을 지닌 귀족들이 대대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분열체제로 중원의 패자 수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영양왕에게 가장 절실한 개혁은 국론을 하나로 모아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풍채가 준수하고 일찍이 제세(濟世).안민(安民)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전하고 있는 영양왕은 재위 2년과 3년 수나라에 거듭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신들의 임무는 조공(朝貢)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과학자.기술자 영입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 문제는 격분해서 영양왕 8년(597) 위협적인 국서를 보내왔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朕:수 문제)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靺鞨:훗날의 여진족)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禁錮)시켰다…. 우리나라는 공인(工人)이 적지 않으니,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나에게 주청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다연발 활 제작기술자)를 빼어갔다.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왕은 짐의 사자(使者)를 빈 객관(客館)에 앉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고 보지도 못하게 했다.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 짐의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수서(隋書)'동이열전 고구려조)"
'말갈을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 시켰다'는 것은 고구려가 수의 통일 이후에도 계속 여러 제후국들을 거느린 태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영양왕은 사신들에게 노수(弩手) 등 과학자.기술자를 영입해오게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수 문제는 진(陳)나라를 멸망시킨 것처럼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영양왕의 선제공격과 승리
수 문제의 위협적인 국서에 고구려는 발칵 뒤집혔다.
한쪽에서는 수나라에 진사(陳謝)사절을 보내자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방어를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영양왕은 두 방식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이었다.
'영양왕이 말갈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하니, 영주〔營州: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총관(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 문제가 듣고 크게 노해 한왕(漢王) 양(諒:문제의 넷째 아들)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삼아 수륙군(水陸軍)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9년조(598년)'
영양왕은 요하를 건너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고구려 군사가 아니라 말갈군사를 이끌고 공격한 것이다.
비교적 약체인 말갈군사를 이용한 이유는 친위군을 보호하는 한편 심하게 갈라진 고구려의 국론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대 세력'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영양왕은 선제공격이란 충격요법으로 고구려 국내를 전시체제로 개편하려한 것이다.
실제로 수 문제는 넷째 아들 한왕(漢王) 량(諒)과 왕세적(王世績)에게 수륙군(水陸軍) 30만을 주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제1차 고.수대전이 발생한 것이다.
수나라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처럼 단숨에 멸망시키겠다는 자세로 북상했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결된 고구려의 거친 반격이었다.
수나라 대군은 그해 9월 죽은 자가 10에 8, 9나 된다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공격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한 처방의 국론통일과 철저한 대비가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현재 세계는 치열한 경제전쟁 중이다.
우리 사회는 이 총성 없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10여 년 전 어느 기업인이 말했던 '2류 기업, 3류 행정, 4류 정치'는 과연 개선되었는가? 최소한 우리의 경쟁상대국보다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 시스템을 갖고 있는가?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수나라 30만 대군을 일거에 격퇴한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1류국가 '태왕국(太王國)'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영양왕은 이 전쟁 직후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고구려 역사서인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게 했다.
중원의 패자 수나라를 완파하고 명실상부한 태왕국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과연 총성 없는 전쟁에서 승리해 우리 후손들에게 1류국가를 건설한 자랑스러운 '신집'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끝내 1만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고 3류국가로 전락한 부끄러운 대한민국을 전할 것인가?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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