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잊혀진 문화유산-장기 동배곶 말 목장

'호랑이 꼬리'인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虎尾串). 이곳은 해마다 1월1일이면 국가행사인 '해맞이 축전'이 치러지는가 하면 '대보 국립등대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관광명소다.

이 호미곶이 조선조때 군마(軍馬)를 방목해 기르던 유명한 '장기 동배곶(冬背串) 말 목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다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곶(串) 한 복판을 가로질러 돌성(石城)을 쌓아 그 안에 말을 놓아 길렀다.

바다에 빠져 죽지 않는 한 말들이 도망 갈 수 없는 천혜의 목장이었다.

'영일군사'에 따르면 목장의 규모는 높이 열척(약 3m)에 길이 4천190파(把)(한파가 두팔을 벌린 길이로 약1m50cm이므로 전체 길이는 약 6km)라고 적혀 있다.

돌성은 구룡포읍소재지에 있는 돌문에서 시작해 눌태리 구릉지→말봉재→매봉산 곽암→공개산 서북쪽 정상→동해면 발산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돌성은 갈수록 훼손이 심해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구룡포 수협 구 어판장 앞 골목길을 따라 비탈진 언덕을 오르니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곳에서 30분정도 가면 '말봉재'라는 언덕이다.

동행한 향토사학자 이상준(45)씨가 '말봉재'라는 이름은 과거 이곳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으므로 말 목장의 '말'(馬)과 봉화대의 '봉'(烽)을 따붙인 이름이라 설명했다.

말봉재에서 산길을 따라 30여분정도 더 가니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돌성이 보였다.

돌성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흩어져 원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 구간은 아직도 성의 윤곽이 뚜렷해 과거 형태를 어느정도 유지했다.

특히 공개산 서북쪽으로는 아직도 높이 1~2m정도의 자연석 돌성이 수백m 이어지고 있었다.

돌성 훼손의 결정적 원인은 마을 사람들이 통행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해방 전까지 영일만쪽인 동해면 흥환리, 마산리 사람들은 이 돌성을 따라 구룡포를 오가면서 밟고 다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몇년전 포항시가 임도(林道)를 S자로 개설하는 바람에 돌성 군데군데가 또다시 잘려나가고 말았다.

향토사학자 황인(동해정보여고 교사)씨는 "바다에 인접한 곶을 이용해 말을 방목했던 곳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문화 유산"이라며 "돌성만이라도 더 이상 훼손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장기곶 말 목장은 언제, 왜 생겨났으며 또 언제 없어졌을까.

목장이 생겨난 것은 조선조 효종의 북벌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효종은 세자때인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했다.

나중에 임금자리에 오른 효종은 김상헌, 송시열 등 북진파들과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전국 여러군데에 군사용 말 목장 성이 생겨났으며 장기곶 말 목장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장기곶 목장은 말 관리인 141명, 말 물먹이는 곳 50곳, 축사 19채가 있었으며 매일 6명이 말똥을 치웠고 매월 말 242마리를 중앙으로 보냈다.

또 호랑이 등 짐승 습격과 외부인 침입을 막기 위해 포수 30명, 군종 20명이 일했다고 하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효종 전까지 포항 지역에는 일월(日月)목장(현 해병사단내), 경전(鯨田)목장(장기면 상옥리), 봉림(鳳林)목장(흥해읍 곡강리), 마장(馬場)목장(흥해읍 성곡리) 등 소규모 말 목장이 있었으나 '동배곶 목장'이 생기면서 이곳으로 통폐합 되었다.

목장은 갑오경장(1894년) 후 잠시 폐쇄되었으나 을사조약(1894년)과 함께 일제에 의해 완전히 없어졌다.

없어질 당시 남은 말 300마리는 일제가 군용으로 징집해갔다.

지금은 돌성만이 이곳이 조선조때 유명한 군사용 말 목장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가까운 호미곶의 현대적인 관광자원과 잊혀져가지만 보존해야할 귀중한 문화유산인 '동배곶 목장'의 돌성을 연계시킨 관광개발도 생각해봄 직하다.

포항.임성남기자 snlim@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