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금 세계는-(4)그리스의 올림픽 준비

그리스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터득한 비결 중 하나가 "인생 만사 서둘 일이 없다"는 다소 냉소적 생활관이다.

심지어 어떤 대사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오늘 일을 내일로 양보하는 미덕의 나라" 라는 패러독스를 주저치 않았을 만큼 이 나라엔 지나친 낙천성과 무책임이 만연해 있다.

108년 만에 올림픽 발상국에서 열리는 지구촌의 축제, 아테네 하계 올림픽이 개막일까지 80여 일도 채 남지 않은 요즘은 마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온 아테네 시가는 올림픽 공사로 먼지구덩이와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되어 케케묵은 고전의 때를 벗기며 힘겨운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마치 몇 천년 고도의 뒤엉킨 미로의 실타래를 바삐 풀어내며 일확천금을 고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무엇이 이 조용한 게으름뱅이 나라 그리스를 미치도록 바쁘게 만드는가 궁금할 정도다.

필자는 이를 오염된 상업화와 스포츠의 메커니즘으로 보고 싶다.

현대보다도 고전이 더 어울릴 법한 후진 그리스가 첨단 테크놀로지로 억지 춘향격의 쇼맨십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으니 정작 중요한 올림픽의 숭고한 정신은 이미 뒷전에 밀려나 있지 않나 싶다.

어쨌거나 장삿속으로 찌들어가는 상업화된 올림픽에는 지금 그리스 국민들마저도 회의적이어서 얼마 전 여론조사에서는 40%만이 올림픽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적이나 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번 올림픽은 결코 완벽하고 성공적인 대회가 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지진이나 돌발성 폭탄 테러가 없다면 일단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행여나 '대회 사상 처음', '전대 미문' 등등의 수식어와 함께 좌충우돌식 행사로 지탄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올림픽의 종주국이며 제1회 대회 개최국으로서의 프리미엄을 살려 엉성한 운영과 어설픈 진행 방법마저도 소화, 여과시켜 고대 올림픽 정신의 위대한 승계로 돌파구를 찾는다면 더이상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지상 최고 브랜드라는 '코카콜라'보다 몇 천만 배 가치가 있는 '민주(ΔΗΜΟΚΡΑΤΙΑ)'라는 브랜드를 로열티 한푼 없이 2천500여 년 전부터 전세계에 전파시켰고, 의학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로부터 시작하듯 스포츠의 알파와 오메가인 '올림픽'이라는 고유 대명사는 그리스를 가장 그리스다운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민주'의 이름 아래 종교간의 분쟁 소용돌이에 휘말린 지구촌을 하나의 숭고한 스포츠 정신으로 융화시키고자 이번 아테네 올림픽의 슬로건을 유산(ΚΛΗΡΟΝΟΜΙΑ), 참여(ΣΥΜΜΕΤΟΧΗ), 인간적 방법(ΑΝΘΡΩΠΙΝΟ ΜΕΤΡΟ), 그리고 축제(ΓΙΟΡΤΗ)의 4가지 모토로 귀착시켰다.

결코 스포츠의 기본인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것만을 보더라도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세계의 모든 전쟁이 불행하게도 미국이 자처, 자임한 프로파간다라면 이제 그만 인류의 평화를 올림픽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감히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는 2012년부터 그리스에서 영구히 개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필자만의 극한적인 발상전환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오늘의 개혁은 내일의 보수가 된다.

그러나 어떤 명분으로도 고전만큼은 개혁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더 나아가 개혁의 대가로 인류의 유산을 매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는 이번 올림픽에 관여한 책임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올림픽을 기회로 '고전으로 돌아가자(RETURN TO CLASSIC)'라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동양사상을 강조하곤 한다.

그리스가 보여줄 것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첨단 기술과 미국식 상업정신이 아니며, 이번 기회야말로 숭고한 고전의 컨셉을 부활시켜 악용되어 가고 있는 올림픽을 바로잡아 현대 스포츠의 르네상스로 만들 때라고 말한다.

현대화 물결에 서서히 오염되어 가고 있는 목적 상실된 올림픽의 복고주의를 위하여,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아 인류의 축제를 승화시키기 위해서 이번 아테네 올림픽은 반성과 자성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제 그리스인들은 먼 옛날 아테네의 한 골목길에서 당대의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에게 "너의 그림자를 치우라"고 일갈했던 디오게네스의 혈통으로서의 위용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만연되어가는 상업 패권주의자들의 오만과 오판이 지구촌 축제에 드리우는 반(反) 올림픽의 그림자를 그리스로부터 과감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약력

△1947년생 △건국대 정외과 △화가(이탈리아 나폴리시 주최 '이탈리아 2000 국제 회화 콘테스트'최고상 수상) △재 그리스 한인회장 △구주평통 자문위원 △올림픽한인후원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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