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15총선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색 있고 의미 있는 선거였다.
정책의 대결이 표류하고 각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를 뽑는 선거라기보다는 찬탄(贊彈), 반탄 등 당의 사활을 건 과잉 경쟁이 여전해 구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선거법 등에 의해 선거과정의 혼탁성이 많이 개선되었고, 정당들 역시 이전의 정치행태에 대한 자기반성 없이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기본 전제에서 선거에 임했다는 점에서 다른 선거보다 의미가 있었다 하겠다.
특히 이번 17대 국회에는 187명의 새로운 신인 정치인들이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처럼 국회가 젊어지고 또 새로운 신인들이 의욕적으로 새로운 정치발전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은, 이 나라의 발전과 한국 정치의 개혁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며 많은 국민들은 이들을 희망의 눈으로 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항상 강조하거니와, 정치 개혁은 말로만 되는 것도, 제도를 고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도 제도가 미비해서 개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민이 바라는 참다운 새 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원 개인의 의식과 자질, 그리고 당 차원의 획기적이고도 근본적인 새 정치상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처음 이루어진 정동영, 박근혜 대표간의 여야 대표회담에서 '민생경제 우선', '부패정치 절연', 그리고 '원칙에 입각한 의회 정치'라고 하는 3대 원칙이 협약되었다.
과거의 '합의'와 이번의 '협약'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또한 표현의 문제나 문서로 남긴다는 등의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진실로 여야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새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뒤따를 때만이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또 그동안 국회의 권위를 훼손시킨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는, 국회의 제도 미비보다는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몸싸움이나 저질 욕설 같은 것들 때문이었고 대정부질문이나 5분 발언 등을 통한 자기 과시, 실적위주의 국정 운영 때문이었다.
특히 초선의원들은 의욕만 앞서다보면, 여야 격돌시 그 앞장에 서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을 또다시 실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각 당이 준비 중인 '국회의원 면책 특권'의 제한, '불체포 특권'의 제한, 그리고 '국민 소환제' 등의 입법이 그 대안이 될 것이다.
지난날, 독재 권위주의 시대에 야당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런 여러 보호 장치들이 이제는 국회의원들의 비리를 감싸고, 또 국회의 권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되어왔다면 차제에 여야간의 심도 있는 합의를 거쳐 국회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앞으로 점차 국회 회의의 전 과정이 생중계되면, 최소한 과거와 같은 국민들 보기에 지극히 부끄러운 국회는 어느 정도 방지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17대 국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정당들이 거듭 태어나야 한다.
정당들은 더 이상 자기 당의 이념과 노선만이 옳다는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야 하며, 더 이상 국회를 자기 당의 선전장으로 이용하거나, 대선 등 각종 선거를 앞둔 국민 호도의 장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여당은 오만하고 편협한, 다수의 논리로 밀어붙여서는 안 될 것이며, 야당 역시 더 이상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극한투쟁으로 국회를 운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과거의 예를 보면 언제나 정당에서 강경파가 주도할 때, 국회는 극심한 혼란의 장이 된다.
따라서 합리적인 온건파들이 대화와 타협으로 국회운영의 정면에 나설 때만이 비로소 우리 국회는 성숙한 정치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국회의장으로 재직할 때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라고 하는 국회법 제 114조의 2(자유투표)항을 특별히 신설한 바 있다.
이는 국회의원들이 당의 방침에만 따라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거수기 역할을 해왔던 이 나라의 오랜 구시대적 정치를 혁파하려는 국회사적 의미를 가지는 일로써, 이 나라 국회를 '일하는 생산적 국회', '대화와 타협의 민주적 국회'로 만들려는 초석이었다.
항상 강조해오고 있지만 국회는 진정 여당의 국회도, 야당의 국회도 아닌 바로 국민의 국회이다.
17대 국회야말로 국민의 국회로 거듭나고 새로워져야 한다.
세계 교역 12위의 국가에서 언제까지 후진국 형태의 정치가 계속되어야 하며, 국회의 치열한 몸싸움과 정치인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는 모습이 언제까지 토픽이 되어 전 세계에 중계되어야 하겠는가.
국민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큰 희망을 부여 받으며 출범하는 이번 제 17대 국회가 하루아침에 많은 것을 이루려는 성급함보다 주변의 작은 것부터 인내하고 타협하는 가운데 개인보다는 당, 당보다는 국민을 위해 진정 새로운 국회사를 써내려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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