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경제 활로는 없는가-(1)벤처업계

제조업 기반 둔 '튀는 업체'만이 살아난다

한국벤처가 위기를 맞고 있다.

내수부진과 특허분쟁 등으로 취약해진 벤처업계는 프라이머리 CBO(회사채권담보부증권)의 만기도래로 새로운 중대고비에 직면했다.

2001년 이후 모두 5차례 발행된 프라이머리 CBO 전체 액수는 약 2조3천억원(808개 기업). 지난 달 17일에 이어 올해 말까지 1, 2개월마다 차례로 만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와 기술신용보증기금의 만기연장 정책에 따라 '벤처대란'은 없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벤처기업 M&A(인수.합병) 활성화 대책이 잇따라 열릴 만큼 한국벤처는 극적인 구조조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한국벤처와 지역벤처의 현실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2004년 6월, 대구경북 벤처의 '명'과 '암'을 살펴본다.

▨아이디어와 범용기술만으로는 망한다

한국벤처의 전성기는 1998년부터 2002년 사이. 그러나 대구.경북 벤처기업들은 2000년과 2001년 잠깐 벤처열풍을 맛보았을 뿐, 이후로 지속적인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었다.

지역벤처의 참담한 현실은 1998년 8월 대구에서 출범한 (사)한국소호진흥협회의 행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IT기술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벤처기업들이 모여들어 한 때 회원사 숫자가 120여 개에 달했던 한국소호진흥협회는 이제 10여 개의 회원사만 남았다.

그것도 주로 외식 프랜차이즈 업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창업초기 참신한 아이디어로 각광을 받으며, 제3시장에 등록까지 했던 '어린이도서 방문대여점'과 '인쇄편의점' 등도 모두 부도의 아픔을 겪었다.

"평범한 기술을 이용한 참신한 아이디어로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난 수년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시장진입이 자유로운 상황에서 아이디어나 평범한 기술로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김영문 전 한국소호진흥협회장(계명대 교수)은 벤처성공의 요소로 남들과 완전히 차별화되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력을 비롯한 그 무엇(?)을 강조했다.

대구.경북에 산재해 있는 30여 개 창업보육센터 입주기업들의 상황도 마찬가지. 센터마다 임대료조차 내지 못해 퇴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벤처들이 1, 2개씩은 눈에 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박창순 대구경북벤처협회 사무국장은 "2002년 이후 대구.경북 벤처업계에서는 꾸준한 구조조정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퇴출되는 벤처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사업성도, 비전도 없으면서 마냥 기업을 그대로 끌고 가는 엉터리 벤처기업인"이라고 말했다.

▨차별화된 기술력이 경쟁력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벤처업계가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차별화된 기술력과 특허가 보장된 아이디어로 극심한 불황에도 아랑곳 않고 발전을 거듭하는 꿈나무 벤처들이 적지 않다.

LCD(박막액정표시장치) 재활용 기술을 가진 메인LCD(금오공대 창업보육센터)는 최근 공장을 새로 지어 사업을 확장하고 있고, LCD TV를 만드는 히가리노비전(대구산업정보대창업보육센터)은 신생벤처 답지 않게 올해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남대창업보육센터 세라크랙도 초고속 섬유 직기용 라이드를 개발,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면서 짭짤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차별화된 기술력이 건실한 벤처성장의 밑거름이기는 테크노파크 입주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위니텍은 전국의 소방관련 솔루션을 완전 장악하다시피 한 뒤 하드웨어 부문으로까지 사업을 넓혀가고 있고, 아이디정보시스템(바코드를 이용한 공장자동화 시스템)도 서울 사무소를 개소하고 중국진출까지 고려하고 있다.

3차원 레이저 스캐너를 개발한 포디컬처 역시 해외진출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경북테크노파크의 테크자인, 앞선사람들, 아카데미정보통신, 코스모가스텍 등도 주목을 받고 있다.

KOG는 물리엔진 기술과 우수한 고급두뇌를 바탕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라이센서를 받아 개발한 작품들이 국내외에서 잇따라 주목을 받으면서 '지방에서는 세계적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편협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한정열 대구테크노파크 사업부장은 "중소벤처 기업들이 전반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남다른 기술력을 가지고 특화된 시장에 사업을 집중하고 있는 벤처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시 북구 칠곡지역과 산격동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50여개 모바일 벤처들은 지역에서 유일하게 M&A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만 휴대전화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불황을 모르는 업종으로 다른 벤처기업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바일 벤처기업 대표는 "1년 전쯤 모바일 기업에 대한 M&A 등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요즘에는 별다른 말이 없다"며 "오히려 규모가 크진 기업들은 업무성격에 따라 분사하는 경향이 있고, 전체적으로 인력 숫자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스타벤처의 '꿈', 아직은 요원하나

대구경북 벤처업계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IT 등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조벤처이거나 전통산업에다 신기술을 접목한 기술융합형 벤처기업이다.

따라서 경기불황에 대한 저항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경기불황으로 벤처기업의 부도와 폐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회원사 숫자는 올해 초 507개에서 514개로 오히려 증가했다.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김재우 연구원은 "내수침체 등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지역벤처 업체 대부분이 제조분야에 기반을 두고 있어 부도나 폐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문 데다, 벤처창업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전체 벤처기업 숫자가 늘어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지역벤처 가운데 스타벤처가 탄생한다면, 아마 제조벤처 중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 전망이다.

그러나 스타벤처를 키우기 위한 지역의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편이다.

제조벤처 기업이 성장하면서 필요로 하게 되는 공장용지, 마케팅, 금융 등에 대한 지원시스템은 서둘러 보완되어야 할 분야다.

대구 성서첨단산업단지에 1천평 규모로 자리 잡은 신안SNP(디스플레이용 기판 제조업체)의 경우, 첨단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해 지난달 OLED(=유기EL) 코팅 1기 라인을 준공하고, 2기 라인을 건설할 3천평의 부지를 찾고 있으나, 아직 해법을 모색하지 못했다.

주위의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매년 100% 가까운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저렴한 공장부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기업들은 주로 모바일과 디스플레이 관련 제조벤처 기업들이다.

마케팅과 적절한 운영자금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급성장에 제동이 걸린 벤처기업들도 있다.

맥산시스템은 올해 8월 중국 웨이하이에 초소형PC 조립공장을 세우고, 내년 2월에는 성서 4차 산업단지 3천 평에 공장을 신축해 본격적인 재도약을 계획하고 있지만, 마케팅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백광 맥산시스템 대표는 "첨단기술을 활용해 시제품을 개발하면, 이 제품이 시장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또 어떤 전략으로 시장에 접근해야 할지 등에 대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면서 "하지만 중소기업은 마케팅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성인 대구테크노파크 벤처육성팀장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 자신의 능력을 세계시장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갖추어야 우리지역에서도 스타벤처가 탄생할 수 있는데, 제도적 뒷받침이 취약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구테크노파크 벤처공장에 입주한 네오솔은 OLED 동영상 플레이어 개발로 세계 각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운영자금 부족으로 발목이 잡혔다.

6개월 전에 현금을 미리 지급해야만 핵심부품인 IC구동칩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금력이 취약한 벤처기업에게는 너무나 힘든 여건인 셈이다.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벤처기업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사회,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스타벤처의 꿈은 우리지역에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석민기자 sukm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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