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에 50세인 선조의 왕비로 간택돼 적자가 없던 선조와 사이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가 25세가 됐을 때 지아비인 선조 임금이 갑자기 승하했다.
인목대비가 계비에 오르기 전 선조는 공빈(恭嬪) 김씨와 인빈(仁嬪) 김씨 등 후궁을 거느렸다.
그들과 사이에서 여러 아들을 낳았다.
그 중 한사람이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아들로 1575년에 태어났다.
인목대비가 선조비로 책봉된 1602년 광해군은 이미 28세였다.
어머니로 모셔야 할 인목대비보다 광해군은 9살이 많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파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역을 도모했다며 소북파(小北派)를 모조리 몰아냈다.
이 사건과 관련,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그 아들들이 처형됐고 영창대군은 강화 교동으로 유배됐다.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 논의도 불거져 나왔다.
1613년 5월 23일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이위경의 상소를 시작으로 정조, 윤인의 상소가 이어졌다.
이위경은 상소에서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 대우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인목대비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급기야 강화도로 유배됐던 아들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연금됐다.
이 모든 과정은 대북파의 주도권 장악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이 적자임에도 왕위를 얻지 못한데다 비참한 죽임을 당하자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키웠다.
지아비의 따뜻한 사랑도, 아들의 재롱도 잃어버린 인목대비는 서인측의 인조반정 제의에 동의했고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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