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산청지역은 예부터 도자기의 주원료인 백토(고령토) 산지로 유명하다.
지금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로 향하는 초입에는 무려 70여곳의 도자기 공장들이 밀집해 겉으로는 '사기골'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 명성의 맥을 이을 만한 제대로 된 사기장이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산에 밀릴세라 물량떼기(?)를 위해 귀한 백토를 사금파리로 만들어 직원들의 인건비 만들기에만 급급한 공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3년전 야로면 하빈리에서 요즘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젊은 사기꾼 정준환(41)씨를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대학교에서 도자기 공예를 전공한 기자가 꿈을 이루지못한 '실패한 사기꾼(?)'이 되어 처음부터 다시 해본다는 심정으로 '성공한 사기꾼'을 찾아 도자기 체험길에 나섰다.
장이들 사이에선 목공예가를 '나무꾼', 금속공예가를 '대장장이', 사기 그릇을 굽는 도예가들을 '사기꾼' 등의 애칭으로 부른다.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조형학부를 나온 정씨와 디자인을 전공한 장소영(35)씨 부부가 고향인 이곳 미숭산 자락에 '황새목'이란 공방으로 터를 잡은 것은 지난 1997년. 번잡한 도시를 버리고, 조용한 산속에 묻혀 황새의 긴 목처럼 멀리 바라보며 제대로 된 사기꾼이 되어보자는 꿈에서였다.
이 공방은 먼저 물건을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주문생산으로 맞춤형 도자기를 생산하는 '토탈도예' 개념을 뿌리내린 요즘 잘 나가는 공방으로 통한다.
체험을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인근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물론 정씨의 어머님과 한마을에 사는 숙모님까지 매달려 단순작업인 다듬질(정형)에 한창이었다.
초벌구이(소성) 가마를 채우기 위한 끝 손질인 셈.
숙모인 정해자(61)씨는 "남정네들의 우악스런 손끝으로는 오히려 기물을 망친다"는 듯 걱정이다.
그러나 옛 실력을 발휘해 매끄럽게 완성해내자 "뜻밖이다"라며 놀란다.
"사실은 20여년 간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라고 운을 떼자 "그러면 그렇지…"라며 안심하면서도 "여기 제품은 고가품인 만큼 갓난 아기 다루듯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사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일반 도시의 도자기 판매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국 유명 백화점의 관광상품은 물론 각 지방자치단체나 대기업의 홍보용 캐릭터 등 철저한 주문생산을 고집하고 있다.
이날 직접 체험한 다듬질 제품도 '2004년 경북 청도 소싸움대회'에 납품한 황소 모형의 캐릭터와 감위스키 주병으로 이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경남 의령·전북 정읍 등 소싸움대회를 유치하는 곳마다 주문이 쇄도해 즐거운 비명이다.
한국의 소리를 도자기에 심겠다며 제작한 사물놀이상과 골프클럽에 납품할 캐릭터 등 제품도 다양하다.
금방 "이 정도의 제품이라면 충분한 경쟁력이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공방의 성공 비결은 완벽한 원형작업과 도자기 공정 중 대량생산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금형작업, 철저한 제품관리 등 3박자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
일반 도예가라면 혼자서 만능 박사처럼 다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반면, 이곳에서는 철저한 전문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원형은 조형학을 전공한 정씨 몫이고 금형은 석고제형 전문가인 김명석(41)씨, 제품과 현장관리는 김현(41)씨가 각각 분담, 친구사이인 세사람이 척척 죽이 맞는 셈이다.
오전내내 아주머니들과 다듬질을 하고나니 힘든 작업이지만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공방을 꾸렸을 때는 이것저것 작업지시만 했지 다듬질 같은 단순작업은 내 몫이 아니었는데….' 이곳에서 새로운 재미를 느낀 셈이다.
정씨부모는 시골에서 없는 돈을 긁어모아 정씨를 대학에 보냈다
그러나 곧 낙향했고 완성된 제품을 쌓아두고도 '헐값에는 팔 수 없다'던 아들의 고집에 부모는 애가 탔다.
정씨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세상사는 맛이 묻어난다.
초벌구이 물량이 한가마 가득 차자 다듬질을 중단했다.
이젠 소성에 들어갈 차례.
전통가마(장작가마)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LPG를 이용한 현대식 가스가마를 사용한다.
장작가마나 기름가마에서 얻을 수 있는 요변(窯變)에 의한 효과를 특별히 기대할 필요도 없고, 제품의 성격상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가마'가 가스가마라는 것.
오후에는 완제품을 위한 조립작업과 포장작업이다.
정씨는 도예가이지만 도자기만으로 완제품을 만들지 않는다.
도자기와 금속, 목재 등을 결합해 제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이는 것이 '황새목' 제품의 특징으로, 그래서 토탈공예품으로 통한다.
사물놀이상 중 장고를 조립하는 데는 철사 고리와 가죽끼움 등 무려 10여번의 공정을 거쳐야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도예를 전공한 기자가 봐도 생각조차 못해 본 공정이다.
'실패한 사기꾼'이 '성공한 사기꾼'을 찾아 한수 배운 셈이다.
"아하! 제대로 된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까다로운 작업도 해야 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실패했구나…."
포장작업이 끝난 제품을 납품 차에 싣던 정씨는 시집가는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내 작품이 어디에 팔려가듯 천대받지 않고 제자리에 놓여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며 작품에 대한 따뜻한 애착을 보였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사진: 정광효기자(왼쪽)가 초벌구이를 위해 아주머니들과 다듬질(정형) 작업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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