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허세의 헛된 싸움을 버리자

추석이 지나갔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에도 고운 한복 차려입고 떡메를 치고, 송편 빚는 풍경은 우리 마음을 한없이 안온하게 해주었다.

작은 땅, 멀지 않은 고향이건만 새삼 그곳을 찾아 열 시간 넘는 교통체증을 마다 않는 모습은, 옛것이면 무조건 낡은 것으로 몰아버리는 세태 속에서 차라리 아름답기 그지없는 우리만의 풍물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알알했다.

추석과 그 풍속은 확실히 우리 민족이 자랑해도 좋을 멋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이 날을 앞두고 공연히 바빠지고 불안해하는 주부들, 부모님 선물과 돈 준비로 걱정하는 남정네들. 명절 당일에는 만남의 기쁨도 잠시, 부모형제간에 옥신각신 말다툼이 일쑤고, 부엌일에 허리가 휜 여인네들 입에서 한탄과 불평이 질펀해진다.

뿐인가, 처음에 반갑다고 시작한 술자리가 놀음판으로 번지다가 이윽고 주먹질 싸움판으로 바뀌기 예사이니, 번지르르하게 시작된 명절의 그 맛이 말씀 아닌 꼴이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구수한 토란국 맛 아닌 죽을 맛만이 맛으로 남는 명절. 아마도 추석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 정신의 방법적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다면 명분론(名分論, 혹은 名目論 Norminalism)이라는 점에서 이론이 없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속의 실재와 다른 이러한 명분주의는 조선조 주자사상의 중요한 철학으로서 소위 "양반,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속설의 배경을 이루어왔다.

그것은 현실의 유.불리, 혹은 부와 결핍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의연함의 강조로서, 말하자면 멋의 이데올로기다.

생각해 보라. 갓 쓴 도포자락이 살려고 허우적허우적 개헤엄을 친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물론 죽어가는 멋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인물에게 권장될 수 있는 멋일지언정 한 사회의 규범으로서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나아가 허세의 관념이라는 비판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소설가 최인훈의 표현에 따르면 "관념과 풍속의 괴리에 따른 비극"이다.

나는 그것을 맛없는 멋이라는 말로 한번 부르고 싶다.

맛없는 멋의 기이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를 그 기저에서부터 직.간접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닌 상황으로 세상은 언제나 어지럽다.

표리부동하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굳센 이데올로기였던 삼강오륜의 그늘 뒤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했던 궁중모반과 가족참극이나 패덕이 자행되었던가. 삼강오륜은 그 당시로서 필요했던 덕목이었을지 모르나, 인간을 그 규범에 강제시키는 불능(不能)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인간은 그 같은 능력도, 심지어는 선한 의지도 애당초 결여된 한갓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 숱한 역사드라마와 문학작품의 산 증거들을 우리는 매일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지나친 멋, 가장 멋있어 보이는 멋일수록 허위에 가깝다는 견해는 역설 아닌 진리일 수 있다.

남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데, 그들 스스로는 멋지다고 주장하면서 온갖 그럴싸한 명분을 모두 내세우는 이들이 소위 정치인들이며, 이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정치판이다.

우선 그들은 사람들 앞에 나서 출마라는 것을 하면서 명분을 파는 허위 과장 광고를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상대방은 멋이 없고 자기만 멋있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당이 옳고 상대방 당은 그르다는 것 아닌가. 자연히 싸움은 명분 싸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맛은 없어지고 있는 맛마저 모두 떨어져 버린다.

지금 나는 정치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 멋만 있으면 뭐 하나 맛이 있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멋과 맛이 어울리도록 살아 보기를 권하고 싶다.

정치에 명분론적 측면이 강하다면 경제는 실속이 있어야 하니 멋과 맛의 관계가 아니랴. 문학을 비롯한 문화는 어쩌면 그 통합의 장이리라. 허위와 허세의 헛된 싸움을 버리고, 인간과 사회는 그렇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저들이 겸손하게 깨우쳐야 할 텐데....김주연 문학평론가 · 숙명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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