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범어동 풍경-(10)판결에 얽힌 얘기(완결)

아주 오래된 얘기입니다.

한 판사가 사형선고를 내린 피고인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출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잡지, 책 등에서 제법 비중있게 다뤘던 것 같은데 기자도 어린 나이에 이를 흥미롭게(?) 읽어본 기억이 어렴풋하게 납니다.

그 판사는 아마 자신이 한 일을 수십, 수백차례 곱씹다가 속죄의 방법으로 수도자의 길을 택한 것이지요. 참으로 양심이 고운 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암울한 시대적 상황도 한몫을 했을 겁니다.

강압과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누구나 수사기관에 용의자로 찍히면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요. 재판에서도 용의자가 아무리 항변을 해도 수사기록만 중시하던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유죄'로 결론이 나고 맙니다.

요즘 같으면 강력사건 재판에서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하고 일말의 의심만 들게 되면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들어있는 수사기록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던 살인사건 용의자들이 상당수 풀려 나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피고인이 억울하게 죽은 것은 판사의 탓만은 아니겠지요. 그 당시를 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닌 듯 합니다.

"중형을 선고하고 나면 항상 씁쓸한 기분이 들지요. 선고를 받은 피고인이 재판부를 노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영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 판사는 이런 날에는 재판부와 함께 통음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구를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하는 중견 판사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사형 얘기가 나왔는데 그 분이 "자신은 적극적인 사형 폐지론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평소 법과 정의를 강조하는 강직한 분에게서 나온 말이라 얼핏 이해하기 어려웠지요.

더 이상 입을 떼지 않으려는 그 분에게 여러 차례 간청하니 "사형선고를 내려본 판사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요.

"예전에 사람을 여럿 살해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재판을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눈을 한참 바라보다 제 얼굴을 만지니 물기가 느껴지더군요…."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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