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도무지 상큼한 맛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온갖 혼돈과 갈등만이 사악하게 쏟아지는 현실을 한번쯤 벗어날 필요가 있다. 훌훌 털고 간들 좁은 나라에서 어디로 가겠냐 마는, 가깝거나 멀거나 이즈음의 산을 찾고, 또 산이면 어디에고 잠겨있는 절간을 스쳐 지나는 것도, 종교와 무관하게 생활의 작은 청량제가 될 수 있다.
만추의 산은 어느 때보다 깊은 맛이 있다.
성모상처럼 기도하는 불상
다부동 삼거리에서 왜관 쪽으로 가다보면 유학산 아래 각원사가 있다. 모양새만 간신히 갖춘 이 절은 '절간처럼 조용하다'는 말마따나 아주 조용하다. 파여진 곳이 아닌 드러난 곳에 자리잡아 바람이 항시 잠들지 않는 거기, 적당한 돌바닥에 걸터앉아 가볍지만 값싸지 않은 이야기 한 자락을 바람결에 듣는 재미도 괜찮다.
석양 무렵에 절로 오르다보면 초행인 사람은 잠깐 놀라거나 헷갈린다. 절간 마당에 서 있는 석상이 불상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순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팔의 모양 때문이다. 불상들이 양 팔을 따로, 한 팔은 들고 다른 한 팔은 배에 붙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해 이 절의 불상은 합장을 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상처럼 다소곳이 기도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다.
간단한 차이인데 전혀 달리 보이고, 그 달라진 모습을 금방 알아채지 못한 것은 항상 짜여진 틀 속에서 관행적으로 살아온 탓이 아닐까. 관념과 관습으로 이어지는 일상들이 다소 깨어지는 듯한 신선함이 있다. 쉽게 보고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소하지만 만만찮은 각성을 준다.
이 절의 주지 각원 스님이 석불을 그렇게 만들었다. "중생을 위해 기도하는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신자들의 절만 받는 부처가 아니라 기도하는 모습으로 뭍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상에 '기도하는 불상'은 처음이라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는 그 불상은 관세음보살상이다. 불교에서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역할을 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가장 어울리는 보살이라고 한다.
기도하는 불상 못지 않게 각원 스님의 행적도 인상적이고 따뜻하다. 그는 가톨릭 수사 출신이다. 10여년의 수사생활 대부분을 갱생원 등 가톨릭계 불우시설에서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는 시설 수용자와 천진스럽게 꼬집고 장난치고 친구가 되는 수사로 유명했다. 서울시립 갱생원 등지에서 자신의 숙소를 버리고 수용자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함께 자고 뒹굴었다. 부랑자'심신장애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기엔 예기치 않은 위험이 없지 않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해방신학을 공부했다. 4년여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돌연 승가대학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가톨릭과 불교는 제도와 절차에서 차이가 있을 뿐, 근본 가르침은 거의 같다고 말할 뿐이다. 성모 마리아상을 연상케 하는 절 마당의 관세음보살상이 성당의 주보성인과 같고, 주변의 나한들은 천사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때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평화와 축복은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하 수상한 세상 속의 따뜻함
그는 통도사에서 유명스님의 적장자로 법통의 중심에 있었으나 미련 없이 박차고 나왔다. 산 속 한적한 곳에 덩그러니 콘테이너 법당을 만들어 놓고 고행을 했다. 그 와중에 아무라도 맞는 사람에게 주라며 동산병원에 신장을 기증했다. 신장을 떼 주고 3등 병실에 누웠어도 흡족해 했고 상처가 아물자 묵묵히 퇴원했다.
초라한 절이지만 종교법인을 만들어 재산 관리는 법인서, 금전 출납은 신도회서 전담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들어온 푼돈까지 신도회에 보낼 정도로 돈과 담을 쌓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모습의 석불을 만들었듯 자신만의 고집이 있다.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쓴다. 그는 몇 년 전까지 문인협회 칠곡지부장 일을 했다.
높아진 하늘의 따가운 햇살과 계곡을 훑어 오르는 조금 서늘한 바람을 맞다보면 낙엽같이 흩날리는 철학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용서할 수 없다느니, 까불지 말라느니, 칼자루 쥔 자들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권세 자랑에 온 나라가 휘둘리는 하 수상한 세월이다. 이 가을에,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절간처럼 조용한 곳의 이야기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김재열(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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