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김홍도와 신윤복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솜씨가 절정에 올랐다.

조선후기 최고 평론가로 불리는 강세황은 "김홍도는 풍속화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길거리, 나루터, 점포, 놀이마당 같은 것을 쓱쓱 그려낸다.

지금까지 중국 혹은 조정중심의 기록성 풍속화와 전혀 다르다"고 평가했다.

김홍도 그림의 소재는 서당, 주막, 씨름, 빨래터, 집짓기 등으로 일반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다.

특히 그는 주변의 배경을 과감히 없애고 원형구도나 X자형 구도를 이용해 인물중심으로 그림을 구성한다.

이전까지 화가들이 인물의 정적인 느낌에 치중했다면 김홍도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한 예로 똑같이 '새참'을 그리더라도 조영석은 직선구도로, 김홍도는 사선구도로 그린다.

동감을 훨씬 살리는 표현법이다.

김홍도의 화풍은 김득신과 신윤복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득신은 '파적도' '귀시도(歸市圖)' '추묘도' 등에서 정감 어리고 해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신윤복의 그림은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면서도 소재나 표현기법에서 김홍도와 판이하다.

그는 한량과 기녀들의 연정과 남녀의 애정문제를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감각적이면서도 선정적인 그림들이 많다.

특히 그의 그림에서는 남자들은 대체로 주변인물로 처리되고 여성이 중심인물로 배치돼 있다.

배경을 중시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강조하는 것 또한 김홍도와 다른 점이다.

두 사람의 삶도 확연히 다르다.

김홍도는 왕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정조와는 인연이 깊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절, 영조대왕의 세손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신윤복은 권력이나 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민들 속에서 살았다.

그는 벼슬을 하지도 않았고, 도화서 소속의 관원이 되지도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왕명에 의한 그림이나 조정과 관련한 그림이 없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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