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 전문)
29일 타계한 한국 시단의 원로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시인은 영원한 모더니스트였다. 팔순이 되어서도 "시들어버릴 생화보다는 절정의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조화가 더 좋다"며 '예술은 인공이다'란 평소의 지론을 재확인할 정도였다.
경기도 분당에서의 외로운 여생에도 선생은 "시(詩)가 곧 종교"라며 끝내 모더니스트로서의 기조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김춘수 문학을 지탱해온 모더니즘적 바탕이 아니었을까.
선생은 여윈 노구에도 형형한 눈빛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문학정신을 대변했다. 지칠 줄 모르는 시심으로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줬다. 쉰 다섯 해를 함께 살았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황혼의 슬픔과 외로움 탓인가, 선생은 문단 최고령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2002년 출간한 시집 '쉰 한 편의 비가(悲歌)'(현대문학)에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시화(詩化)하기도 했다. 팔십 인생을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인간존재의 양상.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에 대한 고독과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내면 깊숙이 침잠한 눈물처럼 투명한 슬픔의 변주곡이었다.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지난 여름에도 계간 '문학수첩' 가을호에 'S를 위하여'와 '발자국'을 게재했으며,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도 신작 '장 피에르 시몽'과 '손을 잡는다고'를 실었다.
선생과 대구의 인연은 각별했다. 20년 간 대구에 정착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내당동과 만촌동 시절, 시 '수련별곡'을 남긴 동성로의 2층 찻집 세르팡… 대구는 선생이 황금기를 보낸 도시였다.
경북대와 영남대에서 펼쳤던 국문학과 전공 '시론' 강의는 늘 수강생들로 북적댈 만큼 열강으로 명성이 높았다. 선생의 시 '꽃'은 아직도 우리나라 시인들의 최고 애송시 중의 하나이다.
선생은 수년 전 대구에 내려왔을 때 자신의 시세계를 '꽃의 소묘'로 대표되는 초기 관념시에서 '무의미시'로 일컬어지는 '처용단장' 등 중기시,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쉰 한 편의 비가' 등 후기시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시인이 부인을 사별한 후 가까이 의지하며 살던 큰딸 영희(59)씨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며 "평소 입버릇처럼 광주 공원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어떤 늙은이가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보니 조막만한 다 으그러진 내 그림자다. 늦여름 지는 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뒤에서 받쳐 주고 있다.' 선생이 남긴 산보길이란 시 구절이다. 그는 '시'라는 영혼의 울림을 지상에 남기고 영원한 '하늘의 꽃밭'으로 떠났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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