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한(前漢) 때의 사마천(司馬遷)은 어릴적부터 독서에 열중했고, 청년시절엔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사기(史記)'를 집필하던 아버지 사후 태사령 직책을 이어받은 사마천은 유지를 받들어 사기 저술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흉노의 포위로 어쩔 수 없이 투항했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샀다.
○…이릉은 5천 보병으로 흉노의 3만 기병과 싸워 이겼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끝내 패하고 말았다. 당초 무제는 총애하는 후궁의 오빠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자 이릉을 이광리 휘하에 두려했으나 이릉이 이를 거부하고 출전했던 터라 괘씸죄가 더해졌다. 이를 눈치 챈 중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릉의 유죄를 주장했으나 홀로 사마천만이 반대했다. 비록 패했지만 끝까지 사투했던 이릉의 충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마천은 남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던 궁형(宮刑: 생식기 제거 형벌)에 처해졌다.
○…사마천이 불후의 위대한 역사가로 남게 된 것은 감옥에서조차 붓을 놓지 않았던 그 열정으로 마침내 세계 역사상 최초의 통사(通史)이자 중국 정사(正史)의 최고봉인 '사기'를 완성해 냈기 때문이다. 이익을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시류 속에서 홀로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쉽게 사느냐, 어렵게 사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으므로.
○…'풍운의 정객'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17일 타계했다. 1989년 5월 대륙을 뒤흔들었던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시위 당시, 수천명 학생들의 단식농성 현장을 찾아와 "충정을 이해한다. 너무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며 눈물 흘렸던 그였다. 강경파의 무력진압 주장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외치다 축출돼 죽는 날까지 가택연금에 처해졌던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지금 중국에선 신화통신의 한줄짜리 사망 기사외엔 철저하게 언론보도가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가 "15년의 세월, 뚜이부치(對不起: 미안하오), 뚜이부치"라고 한탄했던 사실은 '중국의 양심'이 결코 세인들에게서 잊혀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천여 년 전의 사마천과 현대를 살았던 자오쯔양. 두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데 따른 '아름다운 패배' 가 아닐는지.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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