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이리 와 봐요."
"아저씨, 이거 좀 더 높여야겠어요."
언뜻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일하는 아저씨와 아줌마의 무심한 대화로 들리기 십상이다. "아줌마, 아저씨 맞잖아요"라며 웃음 짓는 두 사람. 이들이 부부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다.
박본현(43)'이정옥(34)씨. 대구시 수성4가의 한 건물 지하에는 이들 부부의 꿈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구 파워 클라이밍 센터. 40평 공간은 바닥을 제외하곤 온통 홀드(인공 암벽의 손잡는 부분)로 덮여 있다. 암벽을 타는 '스파이더 맨'과 '스파이더 우먼'인 두 사람은 결혼 7주년 기념일인 18일에도 이곳에 나와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하며 스포츠 클라이밍을 지도하는 모습이었다.
"연애할 때도 영화관에는 딱 한 번 가봤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등반밖에 생각 안 하니 기념일을 챙기는 건 생각도 못 해요." 9년 전 실내 암장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 94년부터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작해 실력이 뛰어났던 박씨는 아직 초보수준이었던 이씨를 열심히 가르쳤다. 등반하다가 마치 자살하려는 사람처럼 힘없이 추락하는 이씨에게 박씨는 "보호본능이 없다"며 호되게 꾸짖기 일쑤였다. 이 산 저 산 암장을 개척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는 박씨를 따라다니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텄다며 이씨는 웃음 짓는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의 삶에서 등반을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토'일요일이면 예외없이 산으로 간다. 봄, 여름, 가을에는 자연 암벽을 타고 겨울에는 빙벽을 탄다. 하지만 둘만의 데이트는 기대하기 힘들다. 이들에게 등반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항상 따르기 때문이다.
"빙벽과 암벽 등반은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어요. 빙벽은 암벽보다 쉽다고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과 직결된 부분이 많아 더 침착하고 냉철해집니다. 암벽은 난이도를 올리는 과정에서 훈련한 만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어 매력적이지요."
이들은 청송, 밀양, 단양, 설악산 등 빙벽 등반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지만 청송의 인공 빙벽이 전국적으로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청송의 인공 빙벽엔 주말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넘쳐나 등반을 위해 줄을 걸 데가 없을 정도라고.
"다른 남편들은 집에서 살림 잘하라고 얘기하는데, 제 남편은 살 빼라고 구박하고 먹으면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해요." 겨울 옷차림에도 마른 체질인 이씨이지만, 등반을 하려면 몸이 가벼워야 유리하니 남편의 등쌀(?)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단다.
몸이 많이 허약했던 이씨.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작하면서 턱걸이를 30개 이상 가뿐히 할 정도로 건강해진 그녀는 경기지도자'심판 자격을 갖춘, 지방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국내외 대회에서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훌륭한 코치는 바로 남편이다. 대구등반경기 이사를 맡고 있는 박씨는 경기지도자, 루트 세터, 심판 자격 등을 갖추고 세계선수권대회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의 스포츠 클라이밍계를 이끌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후 3시 센터의 문을 열고 밤 12시에 문을 닫는 이씨. 집에 가면 새벽 1, 2시가 넘는 이씨의 생활은 여느 주부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통나무집 등을 짓는 목수 일을 하는 남편 박씨는 한두 달씩 집을 비우기도 한다. 오로지 등반을 생각하느라 아이를 가질 겨를도 없었다는 두 사람. 어쩌다 부부 싸움을 해도 주말에는 꼭 산에 가니 싸운 시간을 오래 지속할 틈이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암벽 등반은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지지해 주지 않으면 남자나 여자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바위에만 가면 죽는 줄 아는 가족이 있다면 어떻게 등반을 계속 할 수 있겠어요."
대구시 북구 연경동의 초보자용 암장, 중'고급자용 유학산 다부동 학바위 암장…. 이들이 주도적으로 개척한 암장들에는 수개월에 걸쳐 흘린 땀과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다.
"여름 등반 시즌에 앞서 한겨울에 등반 루트를 개척하다가 눈보라가 몰아쳐 자일이 엉키는 바람에 위험해 급하게 내려온 적도 있어요. 그래서 붙인 루트 이름이 '미친 바람의 노래'입니다."
실외 루트를 개척하는 '바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정을 강조해 붙인 이름인 '우인의 꿈', 등반할 때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이끼를 제거하려고 청소하다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붙인 이름인 '이끼로 세수하고'…. 틈날 때마다 개척한 암장에 들러 헐거워진 볼트를 조여주고 관리를 계속한다는 이들은 스포츠 클라이밍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한몸으로 뛰고 있는 천생연분 부부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대구 파워 클라이밍 센터 인공 암장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박본현·이정옥씨. 요즘엔 병치레가 잦은 사람들이 건강을 찾기 위해 스포츠 클라이밍을 많이 배운다고 한다. 정운철기자 wo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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