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에서 내린다.
기차가 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앉아 오는 자리-오늘, 그것을 자유석이라고 하는지를 처음 알았다-에 앉았었기에 잠시, 앞으로 가는 나의 발길이 휘청하는 것을 느끼며 걷자니 아직 바깥이 훤한 것 같다.
시계를 본다.
서울역을 떠난 지 얼마 안되었다.
'이 정도면 비행기나 비슷한데? 빠르긴 빠르구나. 글쎄, 우리나라가 너무 작은 탓인가?' 중얼거리며 개찰구로 나오려니 또 여러 가지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아, 참 새 역사(驛舍)이지? 어디 외국으로 착각하겠네. 참 번쩍거리는군.' 나는 계속 중얼중얼거리며 그러나 어깨가 개선장군처럼 되어 역사를 나온다.
언제나 뒷골목엔 을씨년스런 바람이 종일토록 부는 내가 살고 있는 거리로.
그리고 불과 한 세기 전인, 우리나라 근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때 처음 생긴 역사(驛舍)는 얼마나 반짝반짝했을까. 아무튼 그 모든 변화들이 얼마나 빨랐을까? 또 느리디 느리게 울리는 '인경소리'는 그대로 둔 채, 갑자기 많든 일들을 열차 시각을 비롯한 시각에 맞추어 해야 했으니 또 얼마나 힘들이 들었을까. 하긴 유럽에서도 1864년 처음 기차를 타본 시인 하이네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무시무시한 전율과 전례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고 술회했었다고 하니, 일제 식민사회에서 살던 한국 사람들이 그 '철마'에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1906년 대한매일신보는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며 천리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KTX기차만이 지금 빠른 것이 아니다.
휴대전화는 어디서나 '빨리' 우리들을 연결시킨다.
또한 그것은 '빨리' 우리들을 삭제시킨다.
인터넷이라든가 휴대전화의 주소록에서 '누구'인가를 지워보라, 그렇게 '빨리' 지워질 수 없다.
당신도 누구인가의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혹은 휴대전화의 주소 저장에서 사라질 수 있다.
아니, 지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컴퓨터의 클릭은 우리에게 도저히 느린 것은 참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마우스는 늘 가장 빠른 속력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위해 수없이 깜박거리다가 사라져야 한다.
사라짐은 버려짐이다.
빠르지 못한 것은 빨리 버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노인은 도저히 대접받을 수 없다.
느리니까… 너무 느리니까… 어디 '노인네'뿐인가. 책들도 이러한 생각 앞에서는 소위 '고전'이 되어 살아남는 게 어렵디 어렵다.
아무리 좋은 말씀, 또는 신념,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거기 있어도, 생각의 전환이 느리니까 배제될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도 수업계획서의 참고 문헌엔 될수록 '새로 나온 책'을 쓰는 것이 좋다.
그래야 최첨단의 '○○이즘'에 익숙한 것을 알리게 된다.
뉴욕의 패션도 몇 시간이면 전파되는 세상에 이런 구닥다리를,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서울에 가자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기의 아이들이 노인네가 된 자신에게 그렇게 하면 그러지 말라고 야단, 야단이다.
완전한 가치의 혼란이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요즘의 사회는 아무리 빨리 가도 빠르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낙오자는 얼른얼른 사라진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빨리 사라지자 주의'라고나 할는지, 아니 일종의 '버리자 주의'라고나 할는지, 두 가지가 다 합친 '빨리 사라져 버리자 주의'라고나 할는지….
빠른 것만이 아니다.
큰 것, 큰 집에서부터 큰 목소리… 모든 큰 것이 여기 포함된다
큰 것, 높은 것은 현대적이 된다.
우리의 몸은 크지 않은데 아니 크지 못하니까, 큰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몸은 최첨단의 미국식 시스템 속에서 '보다 크게, 보다 높이 움직이는데…' 속마음들은 조선조에 있다.
몸과 마음의 분리가 일어난다.
'분리'의 불협화음이 곳곳에서 인다.
아, 느리게 가고 싶다.
이 빠름의 끝없는 경주에서 벗어나고 싶다.
빨리 버려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가치들은 나혼자 느리게 가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밥이나 먹고 살려면 말이다.
빠른 것만이, 크고 높은 것만이 무엇인가를 움켜쥘 수 있는 사회, 분명 선진 사회는 아닌데…. 강은교
시인·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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