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포럼-기억과 망각의 한국과 일본

독일은 나치 범죄의 피해자들을 찾아 지금도 보상을 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과 식민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회피해 왔다.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독일과 과거를 망각하고 있는 일본의 차이다.

독일은 나치범죄의 멍에를 벗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우뚝 섰다.

일본은 아직도 역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17일 공개한 한일수교협정 문서에는 내용적으로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 공식문서로 확인되었다는 점이 새로울 뿐이다.

문서를 통해 한일 양국정부의 역사 망각 태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의 과거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언급이 전혀 없다(한·중, 한·소 수교협정도 마찬가지이다). 한일관계는 역사의 망각 위에 성립된 것이다.

문서 공개를 계기로 과거를 망각하고 있던 일본과 한국정부는 곤혹스럽다.

체험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희생자들이 한일 양국 정부에 대해 책임을 새롭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피해자의 실태를 개별적으로 조사, 보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한국 정부는 국가가 배상금을 일괄적으로 받아 국내적으로 처리하기로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정부는 1970년대 중반 8만3천519명에게 모두 1천898만 달러를 지급했다.

보상금의 성격에 해당하는 무상 3억 달러의 약 6%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의 건설 등에 투입되었다.

한국 정부는 국민의 개인 청구권 포기를 대가로 경제개발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 후의 경제개발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국민소득은 100달러 정도로 세계 100위 수준이었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 1만1천400달러(세계은행)로 세계 제1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번 문서공개를 계기로 개인 청구권의 효력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공개된 문서에서는 무상 3억 달러가 무엇에 대한 보상인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991년 8월 27일 일본 국회에서 외무성 조약국장은 "한일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한 것으로 한일 양국 정부는 외교권의 행사로서 개인청구권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역사적 책임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해 일본정부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한국의 피해자들이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한일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을 근거로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는 개인청구권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일본과의 재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재협상은 사실상 더 어렵다.

국가 간의 신뢰 체계가 완전히 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의 외교적 보호권 포기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오늘날의 한국경제가 일제 피해자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정부는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근대 국가성립 이후 우리 국민이 국가를 신뢰한 역사는 많지 않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말이다.

군대 기피나 부자들의 국외 탈출 현상, 독립유공자들의 궁핍한 생활 등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신생국가 한국이 국민의 희생 위에 존립해 왔기 때문이다.

한일 수교협정에서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희생시키고, 그 위에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한국도 국민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궁핍한 시대는 지났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가는 국가답게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문서공개가 한일수교협상에서 제외되었던 사할린 한인, 원폭 피해자, 중국 잔류 한인문제, 북한 주민에 대한 보상 문제 등 한일 양국이 망각하고 있는 부분들을 기억해내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이성환 계명대 교수·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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