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쯤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즘 중학생 하루 수업이 평균 몇 시간인가 같은, 딸아이는 잘 알고 나는 잘 모르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물음에 딸아이는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하고 몸까지 흔들며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짜증이 난다는 것인지, 자신의 학교생활이 짜증이 난다는 것인지, 자신이 지금 짜증이 나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경우야 어떻든 내 상식에 아버지의 질문에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자식은 자식도 아닌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그게 무슨 버릇 없는 말이며 태도냐고 소리를 질렀고 딸아이는 어리둥절한 듯 나를 보다가 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뒤따라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옷을 갈아입는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화가 나서 방문 밖에 서서 계속 잔소리를 해댔고 딸아이는 마지못한 듯 그런 말투를 쓰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내내 분이 풀리지 않았다. 거기에는 딸아이 세대의 자기방기적이고 무책임한 가치관에 대한 화, 나와 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생겨났다는 데 대한 서글픔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인가 대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요즘 아이들의 말버릇이 너무 없다고 하면서 내 딸의 예를 들었더니 학생들은 모두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는 어떤 방송사의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연기자가 입에 달고 사는 대사로 젊은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행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그 대사는 상당히 높은 톤으로 애교 있게 몸을 흔들며 말해야 하는데 흉내 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것을 잘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내 딸아이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 자리에서 졸지에 나는 석기시대 혈거인으로 규정지어졌다. 어떻든 그 덕분에 아이들에게서 다소 색다른 말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무슨 반응을 하기보다는 혹 그 말이 유행어는 아닌지 싶어 잠시 주춤하는 버릇이 들었다.
우리 혈거인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입에 달고 다니는 유행어가 있긴 했다. 그때 유행어의 출처는 방송일 수도 있었지만 특수한 직업, 계층 사람들의 은어, 비속어가 많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쪽팔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게 내가 딸아이의 나이쯤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를 뜻하는 '꼰대', 휘황찬란한 '아더메치유(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함)'는 60년대부터 있었다고 그 무렵에 미국으로 이민 간 분에게 들었으니 지금 환갑에 이른 분들도 유행어 경험은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그 유행어를 군사부(君師父) 앞에서 쓰지는 않았겠지만.
유행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우리 의식을 반영하는 어휘는 많다. 그 중 나 자신도 쓰면서 놀라고 놀라면서도 쓰는 말이 "진짜, 정말, 엄청(난, 나게), 굉장히" 같은 말이다. "진짜"나 "정말"은 그 쓰는 빈도수에 놀라고 "엄청"과 "굉장히"는 별 필요도 없는데 습관적으로 따라붙고 있어서다. 자신이 하는 말이며 전개하는 논리의 정확성, 진실성을 강조하는 데 쓰면 안 되는 말이 "진짜, 정말"이다. 쓰면 쓸수록 진실과 정확함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거 거짓말 같은데,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문장을 "굉장히" 정확하게 쓰고 "엄청" 논리도 치밀한 분인데 말을 할 때면 진짜, 정말이 한 문장의 앞뒤에 주렁주렁 붙는 것이 귀고리, 팔찌, 반지, 머리핀, 목걸이를 다 달고 걸고 붙인 미인 같다. 그런 게 없어도 굉장한(!) 미인인데 말이다.
어떤 소설가는 편지를 쓰지 않는데 그 이유가 편지에는 원고료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에 원고료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 입에 담은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안 써도 될 말을 써서, 심지어 쓰면 안 될 말을 써서 옷 갈아입는 순간까지 방문 밖 성난 네안데르탈인들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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