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하나 들고 있으면 환자가 줄을 서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개원 20여 년째인 한 대구시내 소아과 의사는 급변하는 의료환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병원은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와 만족을 파는 기업이며, 환자는 의사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비 선택권을 지닌 고객이라는 인식이 발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경북대병원 산업의학과 송정흡 교수는 "'의료행위=인술'이라는 식의 사고는 이미 옛말"이라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료계는 서비스 개선 등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절은 '생존 마케팅'이다
대구 곽병원은 이달 초 원무과 직원 책상마다 작은 손거울을 비치했다. 환자'보호자를 대하는 창구직원들의 얼굴을 스스로 체크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의 부드러운 얼굴 표정만으로도 환자 불만을 많이 줄일 수 있어요."
이 병원 강진남 친절팀장은 환자를 '아픈 사람'이 아닌 병원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으로 존중하려는 마음의 표출이라고 정의했다. 이 병원은 지난 1995년부터 직원 9명으로 구성된 '친절팀'을 운영해오고 있다. 전화받는 요령에서부터 인사법, 대화기법, 얼굴 표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에티켓을 교육하고 있다. 병원 식당에는 직원들의 웃는 모습을 찍은 '미소ing' 게시판을 운영 중이며 직원 친절교육을 위한 '화요모임'도 갖고 있다. 타 병원으로부터 출강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병만 잘 낫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객불만요인을 분석하면 결국 '휴먼웨어'적인 부분이거든요."
영대병원 고객관리팀 관계자는 "친절이 곧 병원의 생존을 판가름 짓는다"고 강조했다. 병원간의 경쟁이 전에 없이 치열해진 만큼 환자들을 우리병원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기업 전략이라는 것. 이른바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만족)'이다.
경북대 병원은 매월 '친절직원'을 선정,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돕고 있다. 친절직원으로 내정된 직원은 감독팀이 몰래 내사(?)까지 벌인다. 박향란 경대병원 교육연구실 담당은 친절의 유형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0)' 세 가지로 나누어 소개했다. 가령 누군가 촬영실 위치를 물었을 때 '몇 층'이라고 답하면 제로형, 대신 '어디가 아프시냐', '어떤 부위를 촬영하러 왔느냐'라고 되물은 뒤 지름길까지 안내하면 플러스형이다.
친절은 이미 병원 전 분야에 보편화된 전략이다.시내 모 성형외과 관계자는 "병원은 도처에 널려 있고 심지어 KTX 열차타고 서울까지 가서 진료 받는 환경이 된 만큼 병원이 느끼는 위기감도 절박하다"며 "친절은 환자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마케팅이라는 적극적인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텔이야, 병원이야?-고급 인테리어, 편의시설 앞 다퉈
대구시내 ㄱ성형외과는 4개월 전 인근 새 건물로 병원을 옮겼다. 10여 년 간 환자를 봐 온 병원 건물이 낡아 단골 고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자 이사를 결심한 것. 병원 관계자는 "인테리어 비용으로 4천만 원가량이 들었지만 요즘 추세에는 못 미치는 투자규모"라며 "병원이 작고 낡으면 덩달아 의사의 진료실력까지 폄하되는 면도 적잖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사라지고 있다.푹신한 소파와 파라솔, 병원 특유의 흰색 대신 알록달록한 채색과 싱그런 정원으로 꾸며진 병원은 말 그대로 '메디컬 서비스' 공간이다.
최근 개업한 시내 ㅇ산부인과 병원은 아예 호텔에 온 듯한 느낌이다. 흔히 주차장으로 전용되는 정문 앞은 잔디가 깔려 있고 1층 대기실은 호텔 커피숍 분위기로 꾸몄다. "1층 로비의 샹들리에 1개가 EF쏘나타 한 대 가격"이라고 귀띔한 이 병원 관계자는 "병원 전체(5층) 인테리어에 20억 원 정도가 들었다"고 말했다. 바닥에는 독일산 강화마루를 깔았고 병실 벽에는 새집 냄새를 없앨 뿐 아니라 전자파를 흡수하는 처리까지 했다는 것. 복도에는 벽걸이형 62인치 TV가 걸려 있고 병실마다 식사가 배식된다. 2주 입원비가 150만~240만 원이라는 이 병원 산후조리원도 대기자가 줄을 설 정도라는 것.
2년 전 개업한 시내 ㄱ치과는 건축비의 30%에 달하는 30억 원을 인테리어에 투자했다. 치과진료를 두려워하는 환자들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대기실, 진료 공간을 최대한 넓히고 확 트인 감을 강조했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위해 녹색식물을 배치하고 미술품 전시 갤러리도 마련했다.
5년 전 문을 ㅅ연합소아과는 언뜻 유치원을 연상시킨다. 병원 특유의 흰색 대신 빨강, 파랑, 노랑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원색으로 벽을 칠하고 미끄럼틀, 그네, 볼풀(Ball Pool)을 설치하는 등 놀이공간을 병원 내에 들여 놨다.
시내 ㅅ성형외과 원장은 "치과, 피부과, 성형외과 등에서 시작된 고급 인테리어가 이미 내'외과 등 여타 병원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병원 인테리어를 치료의 질(Quality)과 따로 떼내 생각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찾아오는 병원으로
▲'궁금하면 물어 보세요.' 코디네이터
동산병원 간호과 주신헌 간호사는 병원에서 1명뿐인 '장기기증 전문코디네이터'다. 그는 장기 이식 기증자와 수혜자, 의사들 사이에서 조정'중재하는 등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신장, 골수, 간, 각막 등 신체의 장기를 뇌사자로부터 기증받아 말기 장기부전환자 등에게 이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복잡한 의료절차 속에 수술상담부터 검사, 의료'행정적 절차진행까지 모두 담당한다. "전문 코디네이터가 없다면 장기이식 전 과정에 에러가 발생하기 쉽지요."
21세기 유망직종으로 떠오른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를 비롯해 순환기 내과, 치과, 정형외과 등 각 진료분야마다 코디네이터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코디네이터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의료서비스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조율사라 할 만하다.
한 치과병원 관계자는 "코디네이터를 두고부터 '의사 설명이 성의 없다'는 식의 환자 불만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고객서비스 차원에서라도 병원 코디네이터가 확산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영대병원 건강검진센터 배성욱 과장은 "예전에는 병원에서 정해준 항목만 검진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건강검진코디네이터와의 상담을 통해 맞춤형 검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코디네이터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한 성형외과 관계자는 "환자들이 코디네이터로부터 여러 가지 설명을 듣다 보면 의료인으로 착각하기 쉽다"며 "그러나 이들은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 있는 답변을 할 수도 없고 환자유치를 위해 유리한 쪽으로만 정보를 제공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 오실 시간입니다.' SMS서비스
요즘엔 진료 예약일을 잊었더라도 수첩을 뒤지거나 병원에 전화할 필요가 없다. '휴대전화 단문메시지 서비스(SMS: Short Message Service)'를 통해 병원 방문일이나 건강에 필요한 주의사항 등을 환자에게 알려주는 병원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환자관리 시스템은 병원과 환자와의 관계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진료 후에도 지속적인 관리가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환자 입장에서도 필요한 정보를 휴대전화를 통해 간편하게 받을 수 있다.
동산병원 고객관리팀 정병희 SMS 서비스 담당은 보통 이틀 전에 진료예약일이나 종합검진일, CT, 초음파, MRI 촬영일자를 환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1일 발송건수는 평균 600~700건. 그는 "SMS 서비스 개시 이후 예약부도율이 30%가량 낮아졌다"고 말했다. 시내 모 안과는 병원 방문일 뿐 아니라 수술 후 주의사항, 눈병 조심 경고, 생일축하 메시지까지 SMS로 처리하고 있고, 한 산부인과도 출산 후 체크 스케줄을 휴대전화나 이메일로 알려주고 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트럼프, 중동상황으로 조기 귀국"…한미정상회담 불발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