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만보 산책로'를 걸으며

산은 동네 뒷동산을 오르더라도 가볍게 임하면 안 된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겸허함, 그리고 산에 대한 경건함이 늘 함께했을 때 그만큼 얻는 것이 있고 보람 또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월 1일 새벽 부산역을 출발해 도보로 광안대교를 지나, 해운대에서 일출을 보는 강행군을 한 뒤 두 달 가까이 '대상포진'이라는 묘한 병으로 고생했다. 통증으로 잠 못 잔 것이 제일 큰 고통이었고, 평소 유일하게 즐겨하는 걷기와 등산을 못하고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술, 고기, 사우나를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다음의 괴로움이었고, 하루 종일 허송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 또한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호전되자 무리하면 안 된다는 갓 결혼한 딸아이 부부의 간곡함을 뒤로 하고, 한 번쯤은 걸어 보고 싶은 곳이었기에 첫 산행을 나선 곳이 월드컵 경기장 뒤 '만보 산책로'였다. 산책로라는 것은 60, 70대가 가볍게 걷는 범어동 어린이대공원 뒷산이나 문경새재 1, 2, 3 관문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만보 산책로'는 결코 가벼운 산보 삼아 걷는 산책로가 아니었다. 가파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산책로가 아니라 '산행로'로 불러야 좋을 듯했다.

월드컵경기장 우측의 자동차극장에서 출발, 욱수동 덕원고까지의 10㎞ 거리는 잰걸음으로도 족히 2시간은 더 걸렸다. 개울물 소리, 눈과 얼음이 녹는 소리, 새싹이 돋아 오르는 소리, 봄이 오는 소리,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서 걷는다면 3시간은 소요되는 거리이다. 평지의 '만보 걷기'는 1분에 100보, 90~100분을 걸으면 '만보'가 된다.

대구에서 60년이 넘게 살았어도, 이렇게 좋은 곳이 있음을 몰랐다. 누구나 꼭 찾아 걸어 보아도 좋음직한 산행코스다. 정월 대보름을 이틀 앞둔 지난 21일 추운 날씨에도 많은 땀을 후회 없이 흘렸다.

기분은 최고였다. 청계사를 찾는 몇 명 사람들을 빼고 인적이 드물어 무섭도록 호젓함이 또한 상큼했다.

산책로 처음과 끝 부분에 있는 저수지엔 얼음이 반반씩 얼어 있었다.

능선의 소나무가 눈물겹도록 싱싱했고 줄곧 따라다닌 개울물과 계곡 물소리…. 골짜기는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얼지 않은 곳의 맑은 물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발등까지 차오르는 눈을 밟으면서 혼자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그 소리 또한 즐거움이고 그 기쁨으로 절로 웃었다.

종종 등산하면서 하산 후 산기슭에서 뒤풀이라는 하산주로 웃다가 사고가 나는 것을 종종 보았다. 등산은 장난이 아니고, 오를 때보다는 내려올 때 늘 사고가 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산시 너나없이 긴장이 풀려,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산행에도 네 번이나 미끄러졌다.

산은 말이 없다. 나무도 숲도 풀도 그렇다. 산에 오르면서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되씹지만 그리 쉽지 않다. 하산 후엔 또 잊는다. 홀로 산행은 그리움 같은 고독을 즐길 수 있어 더더욱 좋다. '만보 산행로'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늘 그렇게 우리를 기다린다.

이제 3월, 봄이 멀지 않았다. 운동으로는 등산과 걷기가 최고이다. 육체에다 덤으로 정신에까지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봄이 오면 월드컵 경기장 뒷산 만보 산책로에 나서보기를 권한다.

윤수국 왜관 순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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