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日지식인 기고)독도는 한국땅이다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大 명예교수

시마네현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를 의결해 영토 문제의 최전선에 등장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현의회는 이를 무시했다. 사태의 해결은 쉽잖을 것 같다.

한국에서 독도 문제는 나라 전체의 관심사다. 반면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적고 연구자들도 한정돼 있다. 외무성의 홈페이지를 봐도 조잡한 설명뿐이다. 현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이유로 내세운 것은 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 국제법으로 일본 영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문제가 있고 의문도 든다. 시마네현은 1905년 영토 편입 당시 국제법상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주인 없는 땅 선점)'이론을 적용했다.

그러나 고유의 영토론은 모순이다. 이보다 5년 전에 조선은 칙령으로 울릉군 구역에 포함된 점을 명확히 했다. 이를 무시하고 일본은 일·러 전쟁 때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시마네현 고시 이전에 일본은 "다케시마와 일본은 관계가 없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영유 의사를 주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즉 17세기 처음으로 막부(幕府)는 돗토리(鳥取)번 요나고(米子) 마을 어부들에게 다케시마 도해(渡海·바다를 건너감) 면허를 교부했지만 섬의 소유권을 개인에게 인정하진 않았다. 봉건시대에는 토지 전부가 영주의 것이어서, 다케시마(현 울릉도)와 마쓰시마(현 독도)를 돗토리번에 소속된 섬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3년에 걸친 일본·조선의 교섭 결과,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라고 인정해 1696년에 일본인의 도항을 금지했다. 이때 돗토리번은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돗토리번 소속의 섬이 아닌 것으로 막부에 보고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은 외무성 주장처럼 '17세기 중반에 실효적 지배에 기초한 영유권을 확립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1876년 시마네현이 다케시마를 현에 포함시키기 위해 정부에 조회를 요청했을 때 당시 정부 태정관은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회답, 영유의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했다.

이후 현재의 다케시마(막부 시절의 마쓰시마)는 공식적으로 '리앙크르 록(Liancourt Rock)'이라는 이름이 붙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앙크르라는 말은 프랑스 포경선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지금까지 그대로 써 온 것을 봐도 '고유영토'라는 인식이 부족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의회가 말한 고유영토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고 논거도 불충분하다. 이 외에도 다케시마를 둘러싼 논점은 많아 한국 측과 의견을 다퉈가며 자신들의 주장을 하겠다면 이론·반론에 답할 수 있는 이론 무장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도 졸속은 금물이고 시간을 두고 신중한 토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나이토 세이추(內藤 正中)시마네대 명예교수는1929년 오카야마현에서 출생해 경도대경제학부를 졸업했고 1968년 시마네대 교수가 됐다. 1983~86년 시마네대 법문학부장으로 근무했으며, 저서로는 '시마네현의 역사' '시마네의 백년' '일본해지역의 재일조선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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