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자, 정혜

아동 청소년기 성폭행의 충격

성폭력의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의 모습을 담은 영화 '여자 정혜'. 아동 청소년기의 성폭행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정혜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로운 일상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다.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과는 달리 정혜는 느리고 말이 없다. 통근버스가 와도 뛰어갈 생각이 없고, 누가 비난을 해도 대꾸하지 않는다. 주말이면 종일 낮잠을 자고, 사람을 대하기 싫어서 필요한 것은 홈쇼핑으로 해결한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던 그녀는 버려진 고양이와 애인에게 배신당한 낯선 남자에게는 유별나게 동정심을 발휘한다.

정혜는 왜 식물처럼 이토록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걸까. 사실 그녀는 결혼 경력이 있다. 신혼여행 도중 남편을 떠났다. 첫날 밤, 남편이 아내의 혼전 성경험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하자, 정혜는 자포자기한 듯 "그냥 아팠어"라고 대답한다. 그날 새벽 혼자 떠남으로 결혼 생활은 끝났다.

정혜에게 숨겨진 상처가 있는 걸까. 정혜는 열다섯 살 되던 어느 여름날, 집에 놀러온 고모부에게 강간을 당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입는다. 그 후 그녀는 모든 남성을 자기를 파괴시켜버리는 두려운 존재로 여기게 된다. 분노와 두려움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줄타기의 삶을 산다. 강간처럼 사람에 의한 폭력은 스트레스가 더욱 심하고 오래 간다. 친밀감이나 성욕과 관련된 감정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결혼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진다.

18세 미만의 아동에게 성적 쾌락을 목적으로 성적인 행위를 하거나 요구하는 것을 '아동 성폭력'이라고 한다. 정혜처럼 청소년기에 성폭력을 경험하면, 반항적이거나 자해하는 경우가 많고 우울감, 불신감, 학습부진, 성에 대한 혼란, 기억상실 같은 해리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 가족과 세상에 대한 배신감, 자신이 망쳐졌다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된다. 아동기에 성 학대를 경험한 5명 중 1명 정도는 심각한 장기적인 영향을 받아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해리장애, 주체성장애, 신체화 장애, 행동장애가 생기기 쉽고, 여성의 경우 자살 시도가 일반인보다 2~4배 높아서 성 학대의 경험 자체가 자살을 예측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일회적인 외상적 사건은 심리적인 영향이 뚜렷하지만, 만성적인 성 학대는 아동의 두뇌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대를 오래 받을수록, 뇌 용적이 감소하고, 뇌실이 커진다. 이런 기질적인 문제까지 초래할 수 있는 아동청소년기에 성폭력에 노출된 경우는 반드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여류 문학가 버지니아 울프는 결혼 생활 30년 동안, 남편과 단 한 번의 부부관계도 가지지 않았다. 그녀의 성과 육체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의붓오빠의 반복적인 성폭행에서 비롯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전, 남편에게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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