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참담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 프랑스 대입 논술 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주요 내용을 다룬 이 책은 프랑스 고교생들의 높은 지적 수준과 풍부한 독서량, 자유분방하면서도 균형 잡힌 사고 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도록 해 주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니 문제풀이와 모의고사,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찌들려 일 년 내내 한두 권의 책도 온전히 읽지 못하는 우리 고교생들의 답답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씁쓸했던 기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있다.
특히 기억을 되살리는 건 서점에 갈 때다. 한두 해 사이에 지식, 교양, 논술 등을 이름에 걸쳐놓은 책들이 줄줄이 쏟아져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열어보면 대개 동'서양 고전이나 유명 인사들의 저서 등의 내용과 주제, 의미 등을 압축시켜 놓은 것들이다. 루소의 사상 다섯 쪽, 노자의 도덕경 네 쪽 등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마치 시험용 암기노트 같다. 책마다 논술, 심층면접 등을 들먹이고 있는 걸 보면 출판의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밤을 고뇌해도 이해가 어려운 것들을 고작 몇 줄에 담아내는 걸 보면 참으로 한국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럭저럭 팔린다는 얘기에는 기가 막힌다.
이런 즈음에 대구시 교육청이 독서 운동에 힘을 쏟는다고 하니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시교육청은 올 들어 초등학교 독서지도 자료집 배포에서 시작해 복지시설 아동들에 대한 독서 치료 프로그램 운영, 독서 사랑방 운영, 독서 페스티벌 개최 등 굵직굵직한 계획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학교별 아침 독서 10분 운동을 시작했고, 시교육청 직원들에게 책을 읽혀 조례까지 독서 운동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고 밝혔다. 힘을 쏟는 정도가 아니라 속된 말로 '올인'하는 분위기다.
벌써 아침 독서 운동을 하는 학교가 생겨나고 있다니 지켜볼 일이지만 한 가닥 우려는 떨칠 수가 없다. 독서 교육의 핵심은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인데 교육청의 일방적인 추진이 여기에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한 틀과 형식을 강요함으로써 교사와 학생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마치 대입 논술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압축단행본을 찾듯, 책 읽기가 삶의 한 과정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억지춘향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는 자칫 독서에 대한 의욕을 잃게 하거나 심층적인 독서를 기피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무작정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게 하는 것도 좋지만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책 읽기에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깨닫게 만드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얘기다.
두터운 옷깃을 세우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따사로운 햇볕이다. 세찬 바람은 옷깃을 더 여미고 몸을 더 움츠리게 만들 뿐이다. 모쪼록 대구 교육청의 이번 독서 운동이 위로부터의 강풍이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피어오르는 봄기운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해 본다.
김재경기자
댓글 많은 뉴스
"제대로 했으면 출마도 못해" "권력에 무릎"…'李재판 중단'에 국힘 법원 앞 집결
노동계, 내년 최저임금 '1만1500원' 요구…14.7% 인상
박홍근 "정당법 개정안 통과시켜 국민의힘 해산시켜야"
대북 확성기 중단했더니…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 껐다
대통령실 "청와대 복귀에 예비비 259억원 책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