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어떤 낯선 이와의 만남. 누구나 여행에서 누군가와 운명적인 만남을 한번쯤 꿈꿔 본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때로는 사진첩을 꺼내 듯 떠올리기도 한다. 1995년에 우리에게 소개된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유럽 횡단열차에서 미국인 청년 제시와 프랑스 여인 셀린느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달콤했던 빈에서의 하루를 그린 영화이다. 영화 속 장면에서 제시는 셀린느에게 마치 오스트리아 빈을 관광시켜 주듯 걷고 또 걷는다. 아무런 영화적 장치 없이 그저 그들의 끊임없는 얘깃거리뿐이었던 영화를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오후 느즈막히 도착한 오스트리아 수도 빈. 역에 도착하자마자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내달렸다. 오페라 극장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포스터 배경이 되었고 영화 속에서 제시와 셀린느의 뒤로 멋진 야경을 선사했던 바로 그 곳이다. 1869년 문을 열어 1918년 궁정오페라극장이라는 명칭에서 지금의 빈 국립오페라극장(Staatsoper Wien)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이라고 여겨지지만 지어질 당시만 해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혹평으로 극장 설계자가 자살까지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오페라극장 뒤쪽에 알베르티나(Albertina)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렘브란트와 뒤레를 비롯한 유명한 화가들의 그래픽 아트 작품이 백만점 이상 소장되어 있다. 이곳 계단을 오르자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가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바로 그 장소가 나타났다. 제시와 셀린느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잠시 쉬는 곳으로 지금은 두 주인공 대신 노부부가 우두커니 서있다. 마치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가 세월이 흘러 이곳을 다시 찾아 그때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오이겐 왕자의 기마상이다. 그 동상 계단에는 여유롭게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이곳은 영화 속 셀린느가 제시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곳이다. 그들처럼 동상 아래 계단에 앉아 멍하니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을 상상해보았다.
열차에서 어떤 부부의 말다툼을 피해 자리를 옮겨앉은 셀린느. 그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제시와 하루동안 빈을 같이 여행하다 예기치 않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아쉬운 이별을 하며 6개월 후에 다시 빈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참 영화같은 얘기지만 한편으론 충분히 있을 법하기도 하다. 왠지 영화 속 그들처럼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오페라 극장 뒤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호프부르크 왕궁을 찾았다. 작은 공원으로 산책나온 사람들, 노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보는 사람들…. 이곳에도 어김없이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가득차있다. 비엔나 커피처럼 달콤한 빈의 모습이다.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가 다정히 거리를 거닐었던 것처럼 나도 한껏 분위기를 내며 산책에 나섰다. 영화에서 그들의 모습 뒤로 보이던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 빨간 트램이 있는 멋진 가로수길 등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간다. 빈의 거리에는 슈테판 성당과 같은 멋들어진 건축물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어 지겨울 틈이 없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미술 작품과 같다. 트램을 타고 마치 영화 속을 거닐 듯 빈의 구석구석을 감상했다. 영화 속 제시와 셀린느가 처음 키스를 나누었던 프라터(Parter)공원으로 향했다. U-Bhan 1호선을 타고 프라터쉬테른역에 내려 조금 걸으니 바로 공원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관람차가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다뉴브강이 보이고 빈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관람차 안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해지는 빈의 시내를 보며 키스를 나눈다. 너무도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이 공원에는 대관람차 이외에도 음악에 맞춰 제시와 셀린느가 춤을 췄던 장면이 나오는 펀치기계와 각종 놀이 기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로 북적일거라 생각했던 놀이 공원은 평일 오후 흐린 날씨 탓인지 한적하다. 우리나라 놀이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 기구들도 있지만 생소한 기구 또한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보기만해도 아찔한 놀이기구를 타고 재밌어 하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벤치에 앉아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를 보며 빈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루가 너무도 짧게 느껴진다. 영화처럼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빈의 멋진 모습과 함께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추억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빈은 기대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박지혜(대구가톨릭대 조형정보디자인과 4학년)
사진: 빈의 국립오페라극장 모습. 지하철역에서 오르면 한눈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사진 위쪽)
오페라 극장 뒤쪽에 자리한 호프부르크왕궁에 위치한 노천카페.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무척 부럽다. 오페라극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알베르티나라는 건물에 있는 오이겐 왕자의 동상. 영화 속에서는 이른 아침 셀린느와 제시가 이곳에 다정히 누워 사랑을 속삭인다.(사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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