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집 한 채를 두고 앞뒤로 그려진 네 그루의 나무.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 그렸다는 '세한도(歲寒圖)'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제주의 그 유명한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나무들. 그리고 견딤. 늙어도 늙지 않는 게 있다면, 아마도 억센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순수한 자연이 아닐까."
추사 선생은 아마도 그림 속 조그마한 초가집에 앉아 탐욕과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오직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믿음을 네 그루의 나무에서 보았을 터이다.
안동 와룡면 서지리 김준(57)씨 집 앞에도 세한도에 등장했던 200년 전 그 나무였을 법한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김씨가 전원 생활을 꿈꾸며 5년 동안 발품을 판 끝에 발견했단다.
세한도가 연상되는 풍광에 첫눈을 빼앗겼지만 다른 입지조건도 김씨 마음을 쏙 빼놓았다. "일터인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전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또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차 소음도 없는 한적한 곳이지요."
땅주인을 설득해 땅을 산 뒤 한옥을 한 채 지었다. 한옥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한옥이 아니다. 목조와 황토로 대변되는 한옥의 구조만 빌렸을 뿐. 현대적인 감각을 색칠한 개량한옥인 셈이다. "어떤 집을 지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스틸하우스, 황토집, 돌집 등 많은 곳을 가봤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은 역시 나무와 흙으로 된 집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어릴 적 전통기와집에서 살던 향수도 한 몫을 했다.
530평의 넓은 대지에 우뚝 서 있는 34평짜리 집은 아담한 느낌이다. 하지만 정원에 살고 있는 각종 화초와 나무들, 그리고 집 뒤편 텃밭에서 숨 쉬고 있는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파, 당근 등 20여 가지의 농작물은 주말에만 살기엔 너무 아깝기만 하다. 김씨는 "주말마다 이곳을 찾아 퇴직 후에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내기 위한 벗들을 가꾸고 있다"고 했다.
전통 한옥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전통기와집에서 보냈던 집주인이 이같은 한옥의 특징을 외면할 리없다. 2층으로 된 이 집도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었다. 김씨 내외가 기거하는 안채에는 방이 하나뿐이다.
대부분의 공간은 주방으로 연결돼 있는 거실이 차지한다. 거실에서 밖의 풍광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전통 한옥에서만 볼 수 있는 분합문을 썼다. 문을 들어올린 뒤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대청마루에 나앉은 듯한 느낌이다.
별도의 현관문이 있는 사랑채는 학문과 교양장소이다. 드넓은 서재와 황토로 꾸민 구들방은 풍요로운 전원의 삶이 물씬 풍긴다. 손님의 숙식 장소로 사용되던 사랑채의 용도를 이 집은 2층 다락방이 대신 맡았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과 눈썹 같은 초승달을 보고는 시골 고향에 온것 같다며 손님들이 좋아하시더군요. 자연의 아름다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릅니다."
김씨 집에는 우리 선조의 삶을 동경해온 집주인의 생각이 가득 담겨 있다. 한지를 바른 한옥 문짝의 형상을 한 형광등에서부터 처마 끝에 달아놓은 풍경(風磬), 메주 전등, 이불장, 분합문까지….
여기에 편리함을 배려한 현대적인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전원의 삶인지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모기, 파리 등의 침입은 미닫이 방충망으로 해결했다. 또 겨울이 춥다는 한옥의 문제점을 이중창과 이중문으로 해결하는 지혜도 엿볼 수 있다.
"도심 일터에서 바쁘게 살다가 주말에 이곳에만 오면 세상이 잠시 정지된 느낌이 듭니다. 요즘 웰빙 화두로 뜨고 있는 슬로우 라이프를 실천하는 셈이지요. 또 텃밭에 나가면 땅의 소중함과 노동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답니다. 전원에 묻혀 살았던 우리 조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있는 삶을 즐겼는지 실감하고 있지요."
김씨의 사랑채 서재에는 '탕흉(蕩胸)'이라는 글씨가 가훈마냥 걸려 있다. '군자의 가슴은 늘 봄날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로 풀이되는 이 글귀처럼 김씨의 삶도 따뜻한 봄날의 오후와 같았다.
사진=박순국편집위원 tokyo@imaeil.com
◇정용의 500자평
시내에서 12km내에 농촌다우면서 전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국도에서 보이지 않고 차 소음도 없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곳을 찾아 '그래도 이만하면 됐다'는 곳에 집을 지었다.
김준씨는 전원을 만끽하며 살기에 불편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 개량된 한옥을 지었다. 사람 사는 집의 종류가 여럿이지만 나무와 흙이야말로 친환경적이면서도 건강주택이란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고향에서 전통기와집에 살던 향수 때문에 한옥을 지을 생각에 5년여 동안 발품을 팔았다.
그 결과가 집안 구석구석에 묻어난다. 현대적인 한옥을 위해 모래, 회, 황토를 3:3:4로 섞어서 벽을 만들었다. 난방이 문제인 한옥의 창을 이중으로 만들어 해결했다. 내부공간은 나무를 그대로 노출하고 쓸모없는 다락은 손님방 2개로 만들어 두었다.
한옥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지는데 김준씨는 그 나눔의 큰 뜻을 잘 헤아리고 있다. 한옥의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과 아이들의 공간이고 사랑채는 외부손님의 숙식 장소로 사용되고 이웃, 친지들이 모여 즐거움을 나누고 자녀들의 공부장소였다. 사랑채의 별도 출입과 꾸밈은 그가 처음부터 가장 중요시했으며 누구나 문을 열고 들면 향기롭고 풍요로운 전원의 삶이 느껴진다.
'400m계주 주자처럼 전속력으로 정신없이 뛰는 삶이 아니라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김준씨의 삶은 원만하면서도 격정적이고, 낙천적이면서도 감상적이라는 한국문화에 맞는 한옥에서 자연의 운치를 즐기며 건강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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