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내 잊혔다가 6월이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이는 곳,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전적기념관.
55년 전 주변 산골짜기를 뒤덮었던 화약 연기 냄새와 포성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한 이곳은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전투로 우리나라를 지켜낸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모르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호국교육 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전적기념관의 탄생 배경에 대해 아는 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이곳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한 여성의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다.
주인공은 현재 다부동 전적기념관 옆에 살고 있는 정순덕(64·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씨. 다부동 전적기념관 건립에 얽힌 그녀의 이야기는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가산면 새마을부녀회장이던 정씨는 1980년 12월 농민대표 자격으로 청와대의 초청을 받았다.
식사를 마친 후 전두환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대화를 하는 자리에서 아무도 말을 꺼내지않자 전 대통령이 "정 여사! 무슨 하실 말씀이 없느냐? 소원 있으면 말해보라"고 권유했다.
"밥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떨렸다"는 정씨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제 고장은 6·25전쟁의 전장이었습니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젊은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살려 교육의 현장으로 삼을 수 있도록 전적기념관을 세워주십시오."
대통령은 정씨의 깊은 뜻을 칭찬하면서 즉석에서 흔쾌히 약속했고 일주일도 채 안돼 군 장성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현지답사를 나왔다.
당시 기념관 주변지역은 논과 뽕나무밭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동네사람들은 모두 농지를 빼앗긴다며 기념관 부지 편입을 거부했다.
한동안 정씨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 기념관 사업은 추진됐다.
설계는 서울의 유명한 건축가가 맡았고 50사단 군인들이 투입돼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며 공사를 했다.
인근 주민들도 밥을 해다 나르며 거들었고 거의 1년 만인 12월 중순 공사가 완료됐다.
준공식에는 6·25 당시 이곳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백선엽 장군이 참석했다.
백 장군은 정씨를 얼싸안고 "내가 할 일을 젊은 색시가 해냈다"며 반가워했고 공사감독을 맡았던 국방부 장교들은 "정씨의 비석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순덕'이란 이름 석자는 기념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적기념관 준공 직후에는 관람객들에게 건립 배경의 주인공으로 초대돼 군인들과 학생들에게 전쟁의 교훈 등을 이야기해 주는 등 교관 역할도 했어요.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자리도 없어졌지요."
자신의 뜻으로 전적기념관이 세워졌지만 정작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점차 잊혀가고 있는 것이 아쉬운 눈치다.
"다행히 지난해 6·25 기념식때 다부동 전우회 고문인 백선엽 장군이 조그만 건립안내문이라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1981년 11월30일 준공됐다.
그 뒤 사무실과 매점, 2층 강당을 갖춘 200평 규모의 '구국관'과 구국용사 충혼비, 주차장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탱크 모형을 한 전적기념관은 북진을 의미하는 정북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꼭대기에는 진격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고 그 옆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요즘엔 학생들과 일반 주민들은 물론 하사관과 사관생도들의 훈련코스로 정착했다.
미군 참전용사들도 이곳을 찾아 참배한다.
매년 10월이면 100여 명의 일본 자위대 군인들도 견학을 다녀가는 등 연간 9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기념관을 관리하는 한국자유총연맹 경북도지회 이태룡(61) 사무처장은 "이곳은 칠곡군민의 전적기념관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안보교육장"이라며 "시설보완을 위해 관리예산의 국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칠곡·이홍섭기자 hslee@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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