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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신문광고…흘러간 옛날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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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김태수 지음/황소자리 펴냄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 고무신이 질기다 함도 별표 고무를 말함이오 고무신의 모양 조키도 별표 고무가 표준이오 고무신의 갑만 키도 고등품인 별표 고무.'

1922년 9월 동아일보에 자주 실린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광고 문구다. 이 당시 고무신은 1인당 한 해 평균 70켤레가 소비되며 신발 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온 짚신을 누르고 국민 신발로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고무신 시장을 점유하기 위한 광고 경쟁이 치열했다. 고무신 업계 대표주자였던 대륙고무는 순종의 아우였던 의친왕 이강(李堈)까지 모델로 내세워 광고 공세를 폈다. 반면 거북선표 고무신은 물결 무늬로 처리한 바닥을 드러낸 광고에서 '일년 사용 보증, 버선에 묻지 안는 것, 뒤축이 달치 안는 것, 가벼워 신기 편한 것' 등 네 가지 특징을 내세워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이 책은 수백 컷의 신문 광고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광고는 우울하고 참혹한 시대상과 함께 근대인들에게 필요했던 것, 근대인들이 욕망했던 것, 근대인들을 유혹했던 것, 근대인들에게 강요됐던 것 등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 지배를 받으면서 한반도는 극심한 지각 변동을 겪는다. 그 변화에 가장 민감했던 이들은 기득권층인 양반들이었다. 기생을 관리하던 권번들의 연합체인 '경성오권번연합'은 1920년 6월 10일자 '매일신보'에 기생을 부르는 데 드는 요금을 공지했다. 권번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 기생의 시간대(서비스 요금)을 개정했다면서 한 시간에 1원30전, 세 시간 반에 4원30전, 경성 밖의 지역은 다섯 시간에 6원50전을 받을 것이니 자주 찾아달라고 광고했다.

권번들이 기생 서비스 요금을 정액제로 바꾼 것은 손님들 불평 때문이었다. 시간에 관계없이 한 번 부르는데 4, 5원을 받는 것은 너무 비싸다는 소리가 고객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요금을 내리면 당장 수입은 줄겠지만 손님이 많아져 수입 감소분을 벌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권번들이 '박리다매'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기생업은 대중 서비스업이 되어 갔고 양반들은 "개쌍놈도 데리고 노는 민중화의 세상"이라며 개탄했다.

변화의 소용돌이가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이르자 조선인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내 목을 벨지언정 내 머리카락을 자를 수는 없다"는 비장한 외침은 '경제계의 복음, 이발계의 혁명' 운운하는 바리캉 광고에 묻혀 버린다. 단발령은 신문 광고에 바리캉과 이발소, 사진관을 불러들였다. 프랑스 발명자 이름을 딴 바리캉은 단발령 이후 신문광고의 간판 스타로 자리 잡았으며 신문은 이발사를 심층 취재해 단발령 이후 사회 변천 과정을 보여 주었다. 사진관은 단발령으로 특수를 누린 곳이 되었다. 조상이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진관을 찾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 창씨개명이 시행되자 일본성명학관은 좋은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겠다며 신문에 광고했다.

일제 수탈로 조선의 밥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미원류의 원조 '아지노모도'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한다'는 광고 문구를 내세워 국수집, 대중음식점부터 시작해 가정의 식탁까지 점령했다. '미각과 영양이 조화된 근대 식량', '고가인 자양 강장제보다 간이하고 염가인 영양 식료', '포켓에 너흘 수 잇는 호화로운 식탁'과 같은 카피를 단 초콜릿과 캐러멜 광고도 등장했다.

신문광고는 민족주의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전후해 등장한 광고들. 신문 전면에 마라톤 영웅 '손기정'남승룡 양군 만세'를 외치며 제품을 광고했고 제약회사 평화당 주식회사는 자사의 '백보환'이 마라톤 우승 원천이라고 광고했다.

또 지금과 같이 세계화가 화두로 등장하면서 영어 학습 광고가 줄을 이었으며 산아제한에 대한 관심 증가로 '삭구(콘돔)' 광고도 신문에 게재됐다. 의학의 발달로 몸을 터부시하던 인식이 바뀌자 포르노그래피도 등장했다. 표지에 피학적이고 가학적인 변태 성욕을 묘사한 책이 출간되었고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나체 사진을 무료로 주거나 10권의 책을 1원에 파는 덤핑 상품까지 나왔다. 기생을 태우고 유람을 즐기는 마이카족의 출현으로 자동차 광고도 우후죽순처럼 생겨 났으며 '화이트닝'기능을 강조한 '박가분' 광고는 여인네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저자는 옛날 신문광고를 모으고 각각의 테마에 맞는 잡지와 수백권의 관련 서적, 논문을 검토해 1천 장이 넘는 원고를 고치고 다시 쓰는 3년간의 작업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소설 '칼의 노래' 저자 김훈씨는 "삶은 무수한 잡동사니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잡동사니들을 헤집고 파헤쳐서 시대를 꿰어뚫는 의미와 징후들을 읽어내는 저자의 눈매는 날카롭고 촘촘하다"고 칭찬했다.

이경달기자 sar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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