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비나리

바람이 다녀갈 적마다 의미를 달게 핥아먹었던 三省堂, 百忍堂이란 글자가 풍장(風葬)을 채비하는 듯 싶더니 감쪽같이 소멸되었다. 이태 전 낡은 유산처럼 나부끼던 여섯 글자가 눈에 거슬린다며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 여동생이 어른들 몰래 비질을 싹싹 해버린 것이다. 기와 지붕 아래에서 팔뚝만한 굵기로 오랜 세월 친정 가족들의 정신을 내리 다스리던 짙푸른 눈썹이 안방과 건넌방 문 위에서 말끔히 제거되자 그 바람에 집의 기가 빠져나간 것인지 비만 오면 집이 새어 걱정거리가 되었다.

한 달 전에는 계시인 양 꿈속에서 집이 하얀 붕대로 감겨지는 꿈을 꾸었다. 상서로운 꿈을 잘 꾸는 내 육감을 좇는다면 비로소 집의 운이 다 되어 새집을 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가족들이 집터를 옮겨 새로 집을 짓는 구상을 하고 난 후 문득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다보니 흐릿한 먼 산이 내 가슴을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 무너진다.

유년의 우리 집 마당에는 나무가 참 많았다. 친정 아버지께서는 앞마당부터 빙 둘러 뒤란까지 1, 2년 걸러 한 그루씩 빈 공간을 찾아 나무를 심으셨다. 배나무, 석류나무, 단감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 은행나무 등이 공존하며 계절에 따라 고유한 먹거리를 6남매에게 제공해주었다. 나무가 많아지면서 내 마음의 텃밭에 심은 감성의 꽃씨들도 하나 둘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저절로 잠이 깬다. 햇살이 감나무의 초록 잎을 반지르르 닦아놓는 낮이 되면 은행나무 드리운 그늘에서 세계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유독 프랑스 문화를 동경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장독대 앞 채송화 꽃잎을 온점 삼아 살짝 글 속에 들여놓고는 석류처럼 투명하고 새콤하게 익어갈 미래를 가슴 설레며 그려보던 것도 그때.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시키러 오셨다가도 "음, 책을 읽고 있네. 그래 계속 읽어라"고 하시고는 이내 돌아서 가신다. 그 시절 내게 있어 독서는 시골 생활에서 편안한 일상을 보장받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카리스마는 다른 부분에서 맹위를 떨치셨으니. 우리 집은 하나의 작은 군대와 같아서 얼마나 생활이 규칙적이고 규율이 엄했는지 모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들판을 다 둘러보고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아침을 드시면 방학이라 할지라도 8명의 가족이 일제히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예의였다. 낮잠을 자면 게으른 사람이 된다고 호되게 야단을 치셔서 빈둥거릴 수도 없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직해야 했다. 거기다 두 살 터울인 자식들이 다투는 것을 금기로 정해 놓으셔서 많은 자식 수만큼 집안이 시끄럽지도 않았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아이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한 아이를 칭찬하시거나 못 하는 아이를 잘 하는 아이와 비교해 열등감을 갖게 하는 일도 없으셨다. 평범한 분이셨지만, 살아가는 기준을 성취 수준의 능력에 두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양식에 초점을 맞추는 현명함도 지니셨다.

집 마당에서는 여전히 자연의 순리대로 나무들이 열매를 제공하고 아버지의 교훈은 자식들 가슴에 살아 있으나, 집은 이제 노화되어 휴식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너희 집은 三省堂이니 생각을 항상 신중하게 하고, 百忍堂이니 많이 참고 살아야 한다"고 하시던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선한데. 바깥벽에 홀로 걸린 시 '휘파람 소리'를 닮은 바람만이 가끔 빈집을 들렀다 갈 것 같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텃밭의 고운 흙 위에는 한여름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한 새집이 소담스럽게 지어지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게 미안스러워 하시지만, 새집에서 내 딸 아이 소미의 말대로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이숙경 시조 시인·신매초등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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