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8·15의 기억

한길사·한국방송공사 엮음/한길사 펴냄

"내 눈에는 '민족해방'이 아니라 '친일파 해방'이 된 걸로만 보입니다. 친일파들은 일본놈들 지시받고 눈치보며 살았는데, 광복이 되고 나니 그런 상전이 없어졌어요. 그러니 나라가 이제 저희 손에 들어갔거든, 해방은 그 사람들이 돼버렸단 말입니다."(조문기-대한애국청년단·부민관 폭파사건 결행)

"왜정 때 경찰들이 호구조사를 실시해 민심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다 없애면 질서가 잡히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박사 그 양반이 큰 정치를 하는 분이라 다시 채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홍순복-주재소 경찰 근무)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종종 그 사람 자신의 이야기 또는 그를 아는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로 남는다. 그래서 해방공간처럼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 다양한 삶을 살아온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길사가 펴낸 '8·15의 기억'은 그런 점에서 역사책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책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길사는 KBS와 공동으로 그동안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역사 기술에서 배제되어온 개인의 기억을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을 벌였다.

이 책에 실린 40명의 이야기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국내 각지는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미국·호주·태평양 지역을 돌아다니며 150여 명의 구술자를 찾아내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1차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비교적 상세한 진술이 담긴 80여 명의 채록 원고를 만들었고, A4 용지 2천 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 가운데 중복되는 진술을 피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고려해 다시 40명의 이야기를 추려 책으로 엮었다.

시기적으로는 해방과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그 시기에 일어난 찬탁-반탁, 철도 파업, 대구 10·1사건, 제주 4·3사건 등을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말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했던 만큼 책에서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서로 엇갈린 인생을 살아온 구술자들의 목소리를 빌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당시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특히 직접 현장에서 체험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충실하게 들어 있어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트랜지스터 라디오 앞에 앉아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듣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8·15의 기억'에는 정치적인 주요 사건들에 관한 체험들과 더불어, 1946년 대구에 콜레라가 번져 사람들이 죽어간 이야기나, 쌀 한 말 값이나 하는 파마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는 이야기, 미군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활비를 번 이야기 등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일화들도 담겨 있다.

한 토막 한 토막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오래된, 그러나 낯설지 않은 풍경들과 쉽게 만나게 된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분명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 일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삶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게 마련 아닌가.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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