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남대 석좌교수 부임하는 김지하 시인

아이러니다. 김지하(본명 김영일). 그가 몸이 부서지도록 저항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착을 가지고 다듬었던 영남대에 석좌교수로 30일 임용됐다.

김지하가 정녕 변한 것일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다들 나를 너무 몰라". 그는 항변할 가치조차 못느낀다고 말했다.

"작품의 표면만 보고 이면적 주제는 보지 못한 탓이야". 그는 예전에 썼던 체제 비판적시가 제3세계의 식민지투쟁을 그렸지만 이 투쟁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세대전승적'이고 '생명과 죽임의 과정'이다는 것. 결국'생명과 평화'를 갈구하는 몸짓이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저항시인이라기보나 생명사상가로 불리는 김 교수. 그는 "이전에도, 지금도 생명과 평화의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나그네'일뿐이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리했 다.

그렇다면 그의 생명사상은 언제, 어디에 왔을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고 7년간 독방생활을 할때였다. "천정이 내려앉는 착란까지 일으켰지만 가느다란 생명의 소리가 함께 들렸왔어. 절망의 순간에 생명의 몸짓이 더 강했지. 이때 깨달았어"

화제가 1990년대로 옮아갔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많았던 노태우 정권시절 '죽음의 굿판을 거둬 치워라'고 일갈, 변절비판을 받았던 그.

"그말을 하고 죽음의 행렬이 멈췄잖아. 내가 욕을 먹는 것이 뭐 대단해. 나는 생명사상에 대한 신념으로 그랬지. 내가 다른 의도를 가졌다면 정치판에 들었을 거야. 평생 조직에 몸담지 않았잖아".

'진보와 보수'논란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는 남북이 갈려있고 시장경제와 분배를 함께 고민하는 사회에서 갈등이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진보와 보수 모두 오픈해왔어. 상황에 따라 중심이 가야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평등과 분배, 시장원리 어느 것 하나를 앞세우는 것은 혹세무민이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는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았다. "2002년 월드컵때 젊은이들의 흥과 열정을 보고는 회고록 결문까지 바꿨어. 이때 수백만이 모였지만 폭력사태나 인종적 편견도 없었고 모두 쓰레기를 치워잖아. 홍익인강의 '흥'이 '한과 내상'으로 변한 우리 역사에서 1천년만에 한을 뚫고 흥이 솟아난 것이지"

김 교수는 이전에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갖지 않았지만 월드컵을 계기로 '젊은이들의 할일들에 물꼬만 터주면 내 인생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고 생각을 바궜다. 그는 영남대 석좌교수를 마지막 이력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학문과 사상의 본고장인 영남지역 문화와 사상을 집대성하고 세계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영남대와 함께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등 인물별, 시대별 사상가들의 철학을 강좌나 강연형태로 정리한 뒤 이를 총괄적으로 체계화, 집대성할 계획이다. 또 영남문화의 세계화와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내용부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놈 촘스키(Noam Chomsky),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오에 겐자부로, 헨리 키신저 등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청, 각종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그는 "가칭'세계화시대 영남 사상의 미래(가제)'를 주제로 해외 석학과 영남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가 공동으로 여는 학술심포지엄, 공동행사를 열고 이를 위해 오는 11월 미국에서 촘스키, 헌팅턴, 키신저 등과 만나기 위한 일정을 잡아 놨다"고 밝혔다.

김지하 교수는 "아직 시도된 적이 없는 영남문화 집대성 구상은 6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는 장기 과제다"며 "영남문화는 물론 나의 사상과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한편 김 교수는 매월 한차례 3~4시간씩 강의와 토론을 병행하는 수업을 하고 첫 강의는 9월13일 오후에 갖는다.

이춘수기자 zap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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