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위대한 패배자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지음/을유문화사

'베레모와 덥수룩한 수염 사이 꿈꾸는 듯한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와 밤색 곱슬머리를 가진 자긍심 강한 미남으로 뭇 여성들의 우상. 걸핏하면 총을 뽑아드는 다혈질에다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잔인한 처단자….'

혁명가 체 게바라. 그는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질서 파괴자이자 체제 전복자였다. 그는 수십 명의 유격대원만으로 전 아프리카 대륙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전 남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겠다고 덤벼든 천하의 환상가였다.

체 게바라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웃음거리는 되지 않았다. 살아서는 패자였지만 죽어서는 승자가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불렀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지난 수천년간 인류의 역사는 승자에 대한 예찬이었다. 세상은 오로지 최후의 승자만을 기억하려고 한다. 실패냐, 성공이냐는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편견은 인류 역사를 승자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 뒤에는 승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노력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승자의 그늘에 가려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이 패배자들의 진실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위대한 패배자'는 바로 이들을 조명하고 있다. 주어진 기회를 포착해서 결연하게 밀고 나갔으나 행운이 따라주지 않아 꿈을 접어야 했던 패배자들의 이야기다. 독일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25명의 좌초된 인물들의 삶을 10가지 패배의 유형으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선 패배자, 끝까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자신의 비운을 인정하지 않은 패배자도 있다. 권력에 빌붙거나 경쟁자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비열하지 않았기에 패배했고,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훌륭한 패배자들도 있었다.

괴테에게 발길질당하고 내몰린 천재작가 렌츠. 그는 결코 괴테에게 뒤지지 않는 시인이었다. 처음 나눴던 두사람의 우정은 훗날 괴테에게는 분노로, 렌츠에게는 불운으로 변했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관계가 불편했던 괴테는 렌츠를 왜소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악의적인 비방도 서슴지 않았고 급기야는 렌츠를 국외로 몰아냈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다. 그 대가로 내가 치러야했던 것은 썩어 문드러진 이 육신뿐이다." 스스로 귀를 잘라내고 까마귀 우는 밀밭에서 자살을 감행한 이 모든 상황은 고흐를 비운의 예술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경탄과 환호를 받다 독약을 선택한 롬멜, 다른 민족은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제국은 잃어버린 고르바초프를 저자는 영광스런 패배자들로 규정한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을 연출한 윈스턴 처칠과 덩샤오핑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전의 저서 '승리자'에서 승리자들은 패배자들보다 훨씬 거칠고 비정하고 역겨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하고 있다.

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