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말 예산 몰아쓰기 '행정 불치병'

멀쩡한 보도블록 파헤치고 가로등 정비…길에 혈세 '줄줄'

23일 오후 대구 북구 산격2동 대구 종합유통단지. 멀쩡해 보이는 보도블록과 경계석이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행인들은 인도 한쪽을 차지한 안전 펜스를 피해 요리조리 곡예를 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이곳뿐만 아니라 대구시내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띈다. 대구시내 기초 자치단체들마다 책정된 예산 소비를 위해 연말 몰아치기 '파헤치기' 공사를 시작, 연례행사가 재연되고 있는 것.

△겨울은 공사철(?)= 대구시내 각 기초자치단체가 이달 들어 발주한 공사는 185건. 이는 지난달(127건)보다 33%나 늘어났다. 동구청 경우, 전체 36건 가운데 24건, 북구는 27건 중 10건이 도로 및 하수도, 인도블록 정비공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효목동 한 주민(45)은 "그동안 동네가 어둡다고 해도 꿈쩍도 않던 구청이 인도블록 공사는 참 열심"이라고 꼬집었다.

연말 파헤치기 공사 대부분은 도로포장 및 하수도 정비, 인도블록 교체, 가로등 정비 등이다. 구청 한 관계자는 "11월이 되면 구청 등 각 행정기관의 계약담당 공무원이 빨리 재정을 다 소진하기 위해 바빠진다"며 "배정된 예산을 연말까지 다 써야 내년도 예산배정에서 사업비 삭감이 없다"고 말했다.

△수십 년 된 고질병= 정부가 연말까지 다 쓰지 못한 '불용예산'에 대해 이듬해로 이월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와 그 산하 공단, 대다수 기초자치단체는 이듬해 예산편성 때 감축될 것을 염려, 연말에 여전히 공사를 집중하고 있다.

겨울에 공사가 집중되면 반드시 필요한 공사가 아닌데도 재정이 집행되는 것은 물론 부실시공도 불러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공사가 중단돼 당초 일정보다 공기가 길어지기 일쑤로, 시민들의 불편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구청 한 관계자는 "매년 이어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모하기 위해 연말에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는 사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해결책은 없나= 대구시나 정부는 연말이면 반복되는 이런 몰아치기 재정집행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 국고 보조금 형태가 아닌 교부금이나 지방세 재원을 활용하는 각 자치단체의 개별 사업에 대한 특별한 통제수단이 없기 때문.

따라서 정부는 지방 교부금을 각 지자체에 나눠주면서 각 개별사업에 대한 성과평가를 반영해 차등화하는 방향으로 지방예산 편성방식을 바꾸는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내 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기초 지자체 예산과 결산에 대해 적극적인 감시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구 서구의회 장태수 의원은 "예산을 심의하는 기초의회가 구청 집행부에 대한 온정주의에서 탈피, 재정 집행 시기와 타당성에 대해 충분히 검토한 뒤에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삭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구참여연대 시민감시팀 김언호 팀장은 "재정집행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대구시내 동네마다 이달부터 인도블록 교체 공사 등 '겨울공사'가 일제히 진행되고 있다. 사진은 인도블록 교체공사가 진행 중인 대구 동구 효목2동 굴다리옆.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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