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두대간 9개정맥 종주 권재형씨

1995년 결혼. 2년뒤 아내의 암 수술. 힘겨운 투병생활….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탈출구가 없었다. 아이를 가질 여유도 없었던데다 마음 둘 곳도 마땅찮았다. 남편은 단지 산을 오르고 걸으며 아내의 회복을 기원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1999년 7월. 남편은 격주로 백두대간(지리산~진부령·670㎞) 종주 길에 올랐다. 아내를 위한 1대간9정맥 종주란 기나긴 산행의 시작이었다. 2년에 걸친 백두대간 종주 끝에 낙동정맥 1년, 낙남정맥 6개월로 넘어갔다. 그렇게 호남, 금남호남, 금남, 한북, 금북, 한남, 한남금북정맥까지 9개정맥을 모두 밟았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위해 매니저 역할을 자청했다. 비록 함께 산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코스를 잡고 하루 이동거리를 가늠하고 차량지원까지 도맡았다.

마침내 지난 11월 27일 이들 부부는 속리산 천왕봉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6년4개월, 3천700㎞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순례길처럼 고되었던 발품은 권재형(41·자영업·대구시 중구 동인2가)·임채미(36·여)씨 부부의 정을 더욱 애틋하게 했다. 다행히 임씨도 차츰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권씨는 그런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한사람은 걷고 한사람은 지원해주며 의술보다 더 큰 부부간의 믿음을 얻은 것이 더 큰 소득입니다."

권씨가 산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아내 때문이었다. 힘들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한의사 한분이 둘이 함께 산행을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 보자고 선택한 게 산행이었다. 처음엔 대구 팔공산 갓바위를 올랐다. 그러다 권씨는 차츰 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정작 마음고생은 아내 임씨가 더했다. 격주로 나서는 남편을 위해 주말마다 차량지원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산행구간 시작점에 남편을 내려주고 구간 도착점으로 이동해 남편을 기다렸다. 8시간 이상을 혼자서 아무일 없이 기다려야 했다.

"종일 기다리긴 하지만 마음만은 남편을 따라갔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걷는 기분이었고 걱정 때문에 힘들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씨는 지난 1999년 크리스마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날도 남편 권씨는 예외없이 산행에 나선데다 하필 눈오는 날 야간산행을 계획했다. 밤 11시가 넘어 덕산재에서 남편을 내려주고 김천시내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내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인데다 혼자서는 여관을 찾을 수도 없어 밤새 차안에서 떨어야했다. 또 한번은 남편이 하산시간인 8시를 넘겨 새벽2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불안해서 인근 파출소를 들렀다. "실종신고를 접수할까요?"하는 경찰관의 물음에 임씨는 "남편을 믿는다"며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임씨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래도 고생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종일 혼자서 기다리며 나름대로 남편에 대해 이해도 하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됐다. "남남이었던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데 힘겨울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을 기다리다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구요."

그래도 남편이 백두대간 종주를 끝내고 낙동정맥 종주에 나섰을 때는 섭섭했다. "백두대간을 끝내고는 함께 좋은 산을 다니자는 약속을 믿고 있었죠. 반대도 많이 했습니다." 임씨가 반대하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30대 중반 한창 일에 매달려야 할 시기인데 산에 빠져있는 남편이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권씨는 멈출 수는 없었다. 한북정맥 종주 때부터는 혼자서 걸었다. 빨리 종주를 끝내고 싶은 조급함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힘들여 걷느냐?"는 질문에 권씨는 웃으며 혼자 걷는 것도 마약이란다. 한번 미친 듯이 걸어보면 그 맛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임씨가 차량지원에 나서야했기에 막상 부부가 함께 산행한 것은 두 구간뿐이었다. 권씨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이젠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가까운 팔공지맥 등의 구간을 짧게 끊어서 함께 산행에 나설 것입니다. 그동안 미안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좀 달래야죠." 권씨는 정작 말은 이렇게 해도 자신하지 못한다. 큰 지도를 보기만 하면 이젠 6개기맥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가기 때문이다.

"1대간 9정맥을 종주하고 난 뒤 산행기록을 뒤져봤더니 엇길로 간 곳을 포함해 2군데 정도 밟지않은 구간이 있어서 이곳만 따로 산행에 나설 계획입니다."

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사진 : 지난 27일 속리산 천왕봉에서 1대간9정맥 종주를 끝낸 권재형(오른쪽)-임채미씨 부부가 두 손을 들고 기쁨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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