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텅 빈 겨울밭에서

주말농장에서 농사짓는 시늉을 한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아직도 모든 게 서툴지만 매번 달라지는 풍광을 즐기는 재미는 쏠쏠하다. 지난 주말에 가니, 배추나 무를 뽑은 움푹한 자리가 흙의 눈 같다. 게으른 나의 이력을 꿰뚫어 보는 눈. 겨울 밭은 모든 걸 다 알고도 침묵하는,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먼 산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다.

텅 빈 밭에서도 즐겁다. 눈부시게 하얀 몸으로만 서 있는 자작은 나의 보물 1호이다. 여름엔 계집애처럼 숱한 수다의 잎 내밀며 그늘 짓더니, 이제 시끄럽다고 호통 맞고 입 다문 애처럼 바람에 항복해 모든 잎 다 떨쳐 버렸다. 하얀 몸에 내 작은 손을 대면, 연못 속에 길게 누운 자작둥치에 작고 예쁜 포켓 하나 달린다. 물속 요정의 짓이야! 짧은 순간 빠져드는 나르시시즘이다.

더덕 밭엔 작년 봄 추위에, 목수건에 마스크까지 끼고 씨 뿌리던 떨림이 비닐 위에 묻어 있다. 알뜰한 손길도 제초제 맛도 모르는 우리 밭은 온갖 야생초들이 노는 아나키의 땅이다. 해서 땅 밑 궁궐 짓는 주인공 더덕보다 엑스트라 냉이가 무대를 압도한다. 손가락을 오므리고, 비닐을 뚫고 나온 넓적한 검푸른 얼굴 감싸 쥐고 흙을 밀쳐내며 살살 당기면 아기 다리같이 탐스런, 뿌연 뿌리 달려 나온다. 흙의 자궁에서 아기를 받는 것이다.

고추밭 정리를 한다. 초록의 생명과 빨간 열정을 지지하던 쇠막대기와 마른 줄기를 뽑으니 푸석푸석 먼지 인다. 무공해 태양초로 만수무강을 믿는 알량한 주인을 비웃듯. 곁에 고구마 밭은 삭막하다. 여름 내내 곁에 있는 목서, 말발도리, 마가목, 미선, 계수, 말채, 산사, 산초 등 나무들의 발목을 조르며 뻗어 있던 고구마 넝쿨은 숨죽었다. 마징가 Z가 사라져서인가?

고구마 캐던 날의 웃음이 나온다. 올해 고구마는 유별났다. 무제한의 자유를 누려서인지 무처럼 크고 둥근 것, 연뿌리처럼 길쭉한 것, 호박처럼 동글납작한 것, 게다가 대형 Z 모양의 것까지 나왔다. 어찌나 무겁던지 '고구마 Z', 아니 '마징가 Z'라 불렀다. 문득 태초의 고구마 모양이 아닐까 싶었다. 연말엔 친지들과 '별난 고구마 파티'라도 해야겠다. "마징가 Z"를 합창하면서….

정화식(대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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