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李太洙 칼럼-되찾아야 할 '모자람의 美德'

여유와 완성 향한 과정 함축 / 자기중심적 '지나침' 경계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경계되고, 중용(中庸)의 미덕이 받들어지는 게 이상적이라 할까. 그러나 요즘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회자되듯이 사정이 적잖이 달라져 있다. 무슨 일에든 남다르게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남보다 앞서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발전이 가속화되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로 치달으면서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오히려 낫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데 문제가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치관은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중심적 성취욕 우선주의' 때문은 아닐는지…. 새치기나 앞지르기가 서슴없이 저질러지며, 심지어 그 믿음을 받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능'으로 낙인찍는다면 곤란하다. 더구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은커녕 '모자라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지양돼야 한다.

그뿐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나치게 욕심부리면서 상대적으로 뒤처진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친다. 심한 경우 남에게 궁핍을 겪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 버릴 만큼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거나 해이에 빠지기 일쑤다.

중용도 그렇지만, 진정성을 담보로 한 '모자람'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인다. 겉으로는 어수룩한 듯하지만, 일단은 우리를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완성을 향한 과정을 함축하기도 한다. 달도 차면 다시 기울게 마련이듯이, 초승달에는 보름달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들어앉을 빈자리가 있어 아름답듯이, 삶의 아름다움 역시 그런 데서 싹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말이 그렇지, 모자라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그런 여유를 가지기엔 너무나 각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처로 괴로워해야 한다.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겸양지덕(謙讓之德)도 마음에 와 닿는 경구가 되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고 버텨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겸손(謙遜)과 사양(辭讓)은 미덕이 아니라 패배와 추락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한 학자가 주장한 대로 '모자람이 결함 대신 바람직한 형태의 여유로 여겨지고,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무능으로 간주되는 대신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정말 물을 건너고 있거나 이미 건너 버린 걸까.

요즘은 아침마다 눈뜨기가 두렵다. 자고나면 놀라게 하는 일들이 기다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작태들은 한심하고 개탄스러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어느 모서리를 들여다봐도 거의 예외가 없다. 법과 상식, 질서와 권위, 나라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독선(獨善)과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면서, 공동가치와 도덕 기준이 허물어진 '아노미적 혼돈'이 우리 사회의 피폐한 자화상(自畵像)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요즘 우리를 혼란과 우려, 절망감에 밀어 넣는 일들은 실로 헤아리기조차 민망하다. 여'야의 대립 정국과 그에 따르는 파행, 배아 줄기세포 논문을 둘러싼 의혹과 실망감, 국가기관의 도청과 이를 둘러싼 논란, 사학법 개정 날치기 파문, 과거사 정리 문제, 높낮이 없이 불거지는 아전인수식 패거리 짓기와 적대감 심화, 노'사 간의 끊이지 않는 갈등 등은 하나같이 '너 죽고 나 살자'는 '지나침'의 소산들이 아니고 무언가. 눈앞의 현실이 이 지경이라면 미래는 보나마나다.

우리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 국가 지도자나 국가기관부터 국민적 상식과 기대에 부응하는 길 찾기에 나서야 한다. 지식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도 그런 몸부림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모자라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제 몫에 충실한 가운데 관용의 가치관도 성숙돼야 한다. 오만과 편견, 한탕주의와 자기기만을 벗은 '겸손과 사양'의 미덕이 요구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부르는 불신과 반목을 넘어 진정으로 '미쳐야 미치는' 새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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