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편지-교육의 공공성 회복하려면

설밑에 한 선배를 만났다. 고3 아들을 둔 그는 "자식놈 때문에 한 달 새 10년은 늙은 것 같다"고 했다. 평소 아들 자랑을 적잖이 늘어놓던 선배인지라 의아해 물었더니 "내가 무능한 탓"이라며 끊었다던 담배를 줄줄이 이었다.

수능 성적이 기대에 다소 못 미친 게 문제였다. 아들은 목표했던 국립대학에서 한 단계 낮춰 서울의 모 사립대에 진학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형제간에 처가에 이래저래 새는 곳 많은 살림살이에다 고등학생 딸까지 있는 아버지로선 지역 대학을 권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그만 하면 고맙다고 하겠지만 서울 사립대 시킨다는 게 보통 형편으로 되나. 등록금에 하숙비에 해마다 족히 2천만 원은 들어갈 텐데 언감생심이지."

보름 가까이 씨름한 끝에 결국 생활비는 제가 벌겠다는 아들의 고집에 손을 들고 말았지만, 아버지의 어깨가 가벼울 리 없었다. "있는 집 아이들은 대학 가서도 학원 다니고 해외 연수도 간다는데…."

입맛이 까끌했다. 마땅히 건넬 위로의 말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와 직업이 세습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의 걱정이 벌써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최근 나온 연구 결과는 이를 확인시켜 준다. 성균관대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상급 정신근로자 아버지를 둔 아들은 하급 육체근로자 아버지를 둔 경우에 비해 상급 정신근로자가 될 확률이 3.62배나 높다. 반면 하급 정신근로자의 아들은 상급 정신근로자의 아들에 비해 하급 정신근로자에 편입될 확률이 2배 이상이다. 상위 직업 계층일수록 부자간 세습 비율이 높고, 부자간 직업 계층의 급격한 변화도 거의 없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실증적 수치도 있다. 사교육비 지출 상위 20%의 가구는 2004년에 월 평균 83만7천 원을 쓴 반면 하위 20% 가구는 월 평균 9만8천 원을 썼다. 8배가 넘는 차이다. 사교육비 지출액이 자녀의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투자가 많은 곳에 성과도 나기 마련. 과거와는 또 다른 형태로 신분 세습이 이뤄지는 신(新)봉건사회라 불러도 결코 어색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래서인가. 평등성과 수월성이라는 교육의 두 가지 측면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고착되고 있다. 심지어 양립할 수 없는 명제로 떼어놓은 채 선택을 강요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면에 흐르는 '내 아이만은'이란 이율배반이다. 고교평준화를 고수해야 한다면서도 내 아이는 좋은 학군 명문고에 보내려 하고, 학교 단위 수준별 수업의 문제점을 줄줄이 지적하면서 내 아이는 수준 맞는 그룹 과외를 시키려 하는 인식이 대수롭잖게 받아들여지는 세태다.

교육이 가장 효율적인 부와 직업의 세습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결국 기댈 곳은 공교육뿐이다. 이를 위해 절실한 것은 급할수록 돌아가는 여유다.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이라도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 만신창이로 만드는 조급함부터 떨쳐야 한다. 여유와 인내로 교육의 공공성을 복구해내지 못한다면 신봉건의 그늘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새해엔 모두가 좀 참으면 좋겠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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