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만 담배를 끊은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며,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꼭 90년 뒤인 1997년 11월 IMF 환란 때 다시 한번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외채를 덜기 위해 시작된 민초들의 자발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제 2의 국채보상운동'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못난 위정자들 탓에 선량한 국민들이 남부끄러운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만은 공통된다. 또 '운동'의 산술적 성과 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민초들이 뿜어낸 애국의 기개만은 둘 다 내외에 과시한 바 있었다.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고, 한 끼 밥은 굶을망정 담배만은 피워야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금연이요, 단연(斷煙)이다. 일본 외채 1천300만 환을 갚기 위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담배를 끊어 모으자고 대동광문회의 서상돈이 주도했을 때, 대한제국의 골초들은 어쩌자고 순순히 따라주었을까. 그러잖아도 이 무렵 '스타', '리리', '야마사쿠라', '아사히' 따위의 상표를 단, 향기 그윽하고 피우기 쉬운, 일본산 궐련들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흡연재미에 푹 빠져있던 조선의 골초들이었다.
수입 궐련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대구의 두 연초 거상이던 마쓰모토(松本)상점과 나카오(中尾)상점이 무허가로 사제 궐련을 만들어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고 당시의 일본신문은 전하고 있다. 잎담배를 담아 물던 장죽이나 곰방대를 멀리하고 궐련흡연에 한창 열을 내던 골초들이다. 대구에서만 당시 일화로 7만 원쯤 모아질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가 언제 우리에게 밥 먹여주었어?" "망우초(忘憂草)마저 안 피우곤 이런 말세를 어떻게 살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불가사의하다.
전국의 날품팔이 노동자, 기생, 백정, 인력거꾼들이 헌금에 더 열성적이었다는 기록은 더욱 놀랍다. 그들의 가난과 박탈당한 인권이야말로 '나라가 못 구해준' 대표적인 사례였는데도 말이다. 또 남성우위사상에 짓눌려만 살던 대구, 서울, 부산, 진남포, 진주의 부인들이 패물을 모아 보상금조로 내 논 것 역시 '눈 먼 자식의 효자'치곤 너무도 섬뜩한 우국충정의 단성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애국심의 발휘는 운동의 주도자 서상돈의 덕성과 친화력, 솔선수범하는 계몽정신이 불을 지핀 결과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851년생으로, 증조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그는 세 번이나 엄혹한 교난을 겪고도 자수성가, 1886년에는 경상도 시찰관(視察官)이란 벼슬까지 제수 받은, 대구유수의 갑부였다. 천주교대구교구 개설 후에는 성직자 돕기와 선교, 빈민구호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서시찰(徐視察)이란 존칭으로 곧잘 불리던 그는 남보다 싼 소작료를 받아 인기였다. 소작권은 공평하게 나눠주었으나 다만 천주교신자에게 우선함으로써 선교의 기회를 넓히려 애썼다.
신부가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기 직전, 교리를 얼마나 깨우쳤나 물어보는 '찰고'라는 수순이 있었다. 첫 질문은 대체로 입교(入敎)동기에 관한 것으로, 신부가 한 촌로에게 물었다.
"신자는 어찌하여 성교(聖敎)를 믿나뇨?"
말이 떨어지자 마자 촌로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서시찰 어른 논 붙일라꼬 예!"
물론 정답은 아니었으나, 너무도 솔직한 답변에 신부는 웃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공원을 볼 때마다 아무리 훌륭한 제 2의 서상돈이 나와도, 제 3의 국채보상운동만은, 그리고 위정자들의 그 비슷한 '나라 말아먹기'만은 제발 없었으면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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