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신(56·대구 동구 신암동)씨는 정신을 놓고 산다. 지난해 시집간 딸아이의 결혼 날짜도, 자신의 집 전화번호도 잊었다. 하지만 2003년 2월 18일, 그토록 잊고 싶던 그날의 기억만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찰나의 순간까지 뇌리에 박혀있다.
"영원히 피하고 싶은 그 날이 다시 돌아오네요." 김씨는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몸을 떨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그는 경남 창원에 있는 사촌형 집에 가기 위해 대구 지하철1호선 칠성역에서 지하철에 올랐다. 불이 난 중앙로역으로 진입한 1080호 전동차. 김씨는 기관차 바로 뒤, 1호 객차에 타고 있었다.
역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연기가 자욱하더니 금새 전동차 안은 온통 연기로 차올랐다. 김씨는 "빨리 출발하든지, 아니면 문을 열어 달라"며 기관사와 2번이나 인터폰 통화를 하며 울부짖었다. 잠시 전동차의 문이 열린 틈을 타 빠져나왔지만 이미 바깥은 암흑천지. 천신만고 끝에 입구를 향해 달린 것만 기억할 뿐.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70일 동안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지금까지 그를 절망의 늪에 빠뜨린 건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불, 연기, 어둠'으로 연상되는 그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일상생활을 불가능할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동안 자살 시도를 벌인 것만 수차례. 시력은 물론,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심지어 부부관계조차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했다. 술을 좋아하고 쾌활해 '호인'으로 통했던 그가 요즘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주변의 시선이다.
"사고 이전의 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곧 참혹한 현실에 절망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김씨가 산으로 피신한 건 그 즈음이었다. 사람이 싫었고 갇힌 곳에 있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김씨는 새벽 일찍 집을 나서, 암자를 떠돌다가 해질녘에나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도 김씨의 도피처가 되진 못했다. 들판이나 인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 봐도 등골이 오싹하다는 것.
"날이 어두워지면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칸막이가 돼 있거나 어두운 실내에서는 오래 앉아있질 못하지요." 기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커피숍에서도 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해했다. 김씨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잃어버린 건강만이 아니었다. '가족'. 가장 소중했던 가족과 가정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30년 가까이 실내 인테리어업을 하며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김씨의 가정은 사고와 함께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됐다. 사고 이후 김 씨가 일을 못하게 되면서 아들은 집을 나가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아내는 일용직 노무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아내는 항상 '안심하라'며 위로하지만 가정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는 제가 어떻게 가장이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 요즘도 종종 자살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아내는 제가 또다시 자살 소동을 벌일까봐 항상 조마조마해합니다."
김씨에겐 더 이상 미움도 증오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건 '아쉬움'이다.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 "이제 제게 남은 바람이라면 그 날의 악몽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뿐입니다. 매년 2월 18일이 되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며칠동안 잠을 잘 수도 없을 지경이니까요." 그는 지하철 참사는 죽어야 끊을 수 있는 기억의 고리라고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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